아파트에서 정치하기

청년주택 선거관리위원이 됐다

by 버들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이 됐다. 홧김에 신청서를 넣었고 얼결에 돼 버렸다. 답답해서 내가 뛴다(?)는 마음으로 했는데, 현관 앞에 붙은 선출 공고를 보니 괜히 했나 싶은 마음이 오간다.


2주 전인가,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또 올라왔다. '또'를 한 번만 붙이기는 애매한 게, 벌써 '5차 공고'이기 때문이었다. 140세대가 넘게 사는 이 아파트에서, 3명이면 되는 선거관리위원을 반년이 넘도록 못 뽑아 고생 중이다.


이게 '고생'인 이유는 선거관리위원회가 꾸려지지 않으면 입주자 대표를 뽑는 선거 자체를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입주자대표를 뽑는다고 해도 모두가 그 자릴 꺼릴 것 같아 걱정이긴 하지만, 애초에 대표 후보 모집 공고조차 내지 못하는 형국부터 바꿔 보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은 최근 이슈가 많이 되고 있는 'SH 청년주택'이다. 입주자들이 모여 있는 익명 카톡방을 통해서 매일같이 하자나 생활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슈들이 공유되곤 한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집을 지어 놓았다 보니 괜한 하자가 종종 있어 보인다. 우리 집은 나름 괜찮은 편인데도 이 카톡방만 보면 집이 하자 덩어리마냥 보일 때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리비였다. 입주 전만 해도 제일 작은 집 기준 7~8만 원 나올 거라던 관리비가 10만 원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알게 된 일부 주민들은 격분하고 SH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SH는 마치 앵무새처럼 답변했다고 한다. "입주자 대표를 뽑아서 관리사무소 측과 조율을 하셔야 한다." 아마 응대 매뉴얼이 그랬겠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화가 날 만하다.

이름에 호수까지 써 붙일 필요가 있나 싶긴 하다 ;;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열불같이 화내던 사람들은, 선거관리위원을 뽑는다는 공고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 하실 분 없나요?'라며 묻긴 했지만 자기가 하진 않았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제 집 하자만 해결되고 제 집 관리비만 해결되면' 잠잠해질 사람들 같아 보였다.


5차 공고가 나올 동안 나도 외면한 건 매한가지. 한번은 공고를 찍어 올리며 등록하신 분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 관리비 나오는 날엔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카톡이 내 질문엔 간데없다. '여기에 이런 걸 묻는 게 아니었는데…' 한탄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


새로 붙은 선관위 구성 공고를 보고서는 괜히 열불이 차올랐다. 매일 힘드니 어쩌니 시끄러운 카톡방을 보면서는 더 그랬다. 진짜 불편하고 힘든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려면 관리사무소와 이야기할 정치적 주체가 필요한 거 아닌가. 이러니 세상이 안 바뀌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대표를 할까? 아니야.. 선거 진행도 언제 할지 알 수가 없는데 무슨..'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다가 선거관리위원이라도 해 봐야겠다 싶어, 등록일 마지막 날에 부리나케 서류를 준비해 관리사무소로 찾아갔다. 사무소장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남성은 갑자기 서류를 들고 찾아온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어쩐 일이에요?"라는 질문에 "선거관리위원 후보 등록하러 왔는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관리소장은 깜짝 놀라서는, 후보 신청서를 이래저래 찾아 헤맸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깊은 구석에 넣어 놨던 서류를 그제야 꺼내 건넸다.


서류 속 일자들은 '6월'로 표기돼 있었다. 아마 그때 몇 장 뽑아 놓은 서류를 아직까지 쓰지 못한 거겠지. '6'을 '12'로 고치면서 그동안의 나를 원망했다. 한때 정치계에서 일하겠다 꿈꿨던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일종의 대표자 성격을 띠는 단체라 그런지, 범죄경력까지 조회를 해야 한다고. 경찰서로 보낼 서류까지 작성을 마쳤다.


관리소장은 "8월에 등록한 한 분까지 지금 두 분인데요. 선거관리위원회는 3명이 원칙이라, 아마 오늘 중으로 다른 분이 오시지 않으면 다음에 또 공고를 내야 할 거예요. 공고가 바로 낼 수 없게 돼 있어서, 30일 뒤에 다시 내겠죠"라고 말했다. 내가 마감일 뒤늦게 온 것이니 아마 없을 거라며, 기다려 보자고 덧붙이면서.


신청서를 내고 나니 마음이 꽤 후련했다. 그로부터 한 주쯤 지난 어제, 내 이름과 호실이 적힌 '선출 공고'가 현관 앞에 붙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이 다음과 같이 1인 선출되었기에 공고합니다." 임기는 2년이다. 2년 뒤에 이 집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렇게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이 됐다. 홧김에 신청서를 넣었고 얼결에 돼 버렸다. 답답해서 내가 뛴다(?)는 마음으로 했는데, 현관 앞에 붙은 공고를 보니 괜히 했나 싶은 마음이 오간다. 열심히 할 게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돼 보고자 마음먹는다. 정치가 전부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것이 정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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