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세비야에서
첫 유럽이요? 근데 왜 스페인에 오셨어요? 한인 민박에서 우연히 만난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첫 유럽이라고 하면은 다들 파리나 런던엘 가던데 왜 스페인에 왔느냐는 말이 이어졌다. 멋들어진 답이 나와야 할 것만 같은 질문이었음에도 답은 단순했다. 비행기가 싸서요… 왕복 80만 원의 저렴한 비행기를 골라 타고 오느라 그랬다는 답변이, 괜히 여행 낭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무렴 어때! 나만 좋으면 됐지. 한국 사람들만 그런 건가 싶지만, 워낙에 시뮬레이션이 과잉된 사회 아닌가. 랜선 어쩌구… 가 너무 많잖아. 여행 영상 몇 개 보지도 않았는데 내 알고리즘은 스페인 여행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관광지인데 ‘사람이 덜 붐비는 입구 꿀팁!’, ‘무료 입장 하는 방법!’ 이런 것까지 꿰뚫고 있는 (머리로만) 여행 고수가 되어있다. 인스타에는 유럽 여행 고수들은 다 하나씩 갖고 있다는 여행용 어댑터와 압축 파우치 광고가 우수수 떴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여행은 초짜가 되려고 떠나는 거 아닌가? 혹은 이방인(초짜나 다름없는 말이기도 하니까)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일 텐데. 우연이라는 가능성을 이렇게나 차단해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는 유튜브에서 여행 꿀팁 검색하는 걸 멈추었다.
첫 유럽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한다, 바르셀로나에선 여기에 가야 한다, 스페인 가면 이걸 꼭 먹어야 한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참 많이도 들었다. 다녀온 사람들에게 부러 추천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해내는 게 일순간에는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르셀로나에 다녀왔는데 꿀대구도 안 먹었다고? (아직 진짜 못 먹었다) 까르푸에서 오렌지 주스 안 마셨다고? (이건 세비야에서 마셨다. 너무 맛있다..) 뭐 이런 질문 폭탄을 받을까 싶어 두려운 마음에 해본 것들도 많이 있다. (당연히 그 경험들은 대부분 좋았다. 가우디 투어를 꼭 하라는, 착즙 오렌지 주스를 먹어보라는 그 추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됐든 그냥 안 해보던 짓들을 하자, 이런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래저래 시도했다. 부러 버스 옆자리의 외국인에게 말을 걸어도 보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이라는 책을 2년 전 읽었지만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기억이 없다..) 유럽여행 카페에서 동행을 구해 카탈루냐 미술관 앞 야경을 보러 가기도 했다. 여행을 오래 다닌 사람들이라 유튜브/블로그에는 안 나오는 맛집(이것도 조금은 오염된 것 같은 수식어지만)을 추천받았다. 이런 재미도 있구나. 알고 임하는 것과 지레 겁먹는 데는 넓디넓은 격차가 있다.
무튼 그런 여행을 하는 중이다. 세비야 2일 차인 오늘은 비가 오는 데다 안달루시아주의 공휴일 중 하나인 안달루시아의 날이라 관광지 외에는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다. 말인즉슨 숙소 라운지에 앉아 글을 끄적거릴 여유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인풋이 너무 많았다…) 아무튼 관광지 주변 식당들 빼고는 문을 연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데 주 6일도 모자라 24시간 영업도 마지않는 한국과는 정말이지 다른 모습이다. 공휴일은 바짝 벌어야(땡겨야, 라는 단어를 썼다 지운다) 하는 날 아닌가? 한국에 살 때면 벅차게 사는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싶다.
어디선가 봤었는데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했다. 말마따나 책을 몇 권 가져와 읽듯이 여행하고 여행하듯 읽고 있다. 그 어느 관광지를 가는 일보다 황홀한 경험이기도 하다. 읽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뇌리에 깊이 남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에두아르도 멘도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바르셀로나를 떠올릴 테고, 이병률의 시를 읽을 때마다 세비야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이 지나면 여행이 절반도 안 남는다.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게 아쉽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받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사실 돌아가서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스트레스받을 이유도 하등 없다. 한국에 가면 시간이 많을 테니 사진들을 쭉 올리고 돌아보며 여행기도 쓰겠지만, 괜히 아웃풋을 만들어 보고 싶어 프롤로그 아닌 프롤로그를 써본다. 쓰다 보니 목이 탄다. 오렌지 주스 하나 사 와야겠다. 다녀오는 길에 있는 젤라토 집에서, 피스타치오를 먹을지 요거트를 먹을지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2025.02.28. 세비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