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이라는 이름의 자기 학대
일주일을 '완벽하게' 버텨낸 대가는 유독 진료가 바빴던 날,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의 고요함 속에서 찾아왔다.
집 안이 적막해지면 낮 동안 억눌렀던 본능이 무서운 기세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허기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입안 가득 채워 넣어야만 살 것 같은 강렬한 '갈망'이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척 타협안을 제시한다. “오늘 정말 고생했으니까, 조금은 먹어도 괜찮아.”
하지만 그 타협은 댐의 작은 균열과 같았다. 무언가를 한 입, 두 입 넣기 시작하는 순간 둑이 터지듯 식욕이 폭발했다. 배가 터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의 나는 치과의사도, 대학원생도, 엄마도 아니었다. 그저 통제력을 상실한 채 허기를 메우려 발버둥 치는 존재일 뿐이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지독한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방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나는 그 수치심조차 다시 '통제'로 해결하려 들었다.
“내일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겠다. 더 많이 뛰어서 이 칼로리를 다 태워버려야지.”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억지로 눈을 뜬 다음 날의 새벽 기상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몸을 사지로 내모는 격이었다. 아침의 고강도 운동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잘못을 씻어내기 위한 '고행'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새벽 기상과 완벽한 루틴은 나를 성장시키는 사다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밤마다 반복되는 폭식과 자책, 그리고 이를 만회하려는 과도한 아침 운동이라는 ‘자기 파괴적 톱니바퀴’의 한 축이었을 뿐이다.
강하게 조이면 조일수록 고무줄은 더 멀리 튕겨 나간다. 낮 동안 나를 팽팽하게 당겼던 그 완벽주의라는 줄이 끊어지며 나를 때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나의 성실함이 사실은 내 몸을 파괴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갓생'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자기 학대를 정당화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