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회의를 했다. 삼 남매와 부모님이 참석하는 이 회의는 오빠가 진행했다. 매주 가장 중요하게 제기되는 안건이 있었는데 “엄마는 꼭 일을 해야 하는가?”였다. 다른 집은 방과 후 엄마가 간식도 챙겨주고 맞이해 주는데 우리는 왜 할머니와 있어야 하는가,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를 돌봐주는데 전력을 다하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전문용어로 왜 우리 엄마는 전업주부가 아니어야 하는가 정도 될 것이다.
엄마의 답은 늘 같았고 우리는 매번 설득되었다.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 멋진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엄마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엄마도 자아실현이 필요한 존재야. 너희가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인생을 완성해가는 것처럼 엄마도 그래. 엄마는 그래서 일을 해야 하고 너희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어.”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그녀지만 이때만큼은 단호했다. 이어서 찬반 투표를 하면 늘 엄마의 승리였다. 엄마가 일하러 가는 건 싫지만 엄마의 자아실현은 뭔지 몰라도 왠지 지지해야 할 것 같았다.
법을 전공한 엄마는 딱하고 억울한 지경에 놓인 여성들, 하지만 변호사는 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다. 대학에서 가르쳤고 내 평생 천명씩 모아놓고 울림을 주던 엄마의 강의를 직접 듣지 못하고 전해만 들은 것이 안타깝다. 엄마의 전성기에는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절부터 내 안에 깊숙이 되뇌어진 알 수 없는 단어, 자아실현.
우리 모두는 어느 지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녀의 일은 누가 봐도 남을 돕는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자아실현의 동기가 있었다. 오로지 이타심만이 우리 행동의 동력이 될 수는 없다. 자아실현이란 삶의 비전을 가지고 하는 여행이며 그 길에서 존엄한 나를 발견하고 배우고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엄마에게는 이것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설득하고 일터로 나갈 수 있는 힘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 삶을 배웠다.
나의 세 번째 책(아직은 제목이 없다)은 우리의 모든 의사결정의 본질, 일과 삶의 본질, 즉 ‘왜 (Why)’가 주제다. 한 개인의 삶이든 기업이든 ‘왜’라는 질문은 한 사람의 일생을, 일하는 이유를, 기업의 흥망성쇠를, 그래서 세상을 바꾼다. 지금 우리가 만든 이 세상은 각자가 가진 삶의 이유, 일하는 이유가 만든 결과물이다.
9년 전 첫 책에서는 우리 사고의 틀걸이인 미디어가 어떻게 해체되었으며 왜 연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살아있는 네트워크, 즉 유기체인지 문제를 정의했다. 진화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소멸되는 네트워크의 속성이 우리 삶에, 우리가 만드는 가치에, 우리가 만드는 비즈니스에 원리로 동작한다는 줄거리를 기억할 것이다. 도구이자 기술인 미디어로부터 벗어나 관계를 만드는 살아있는 네트워크로 생각의 틀걸이가 해체되는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네트워크를 만들고 살아서 성장하도록 만드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왜 연결하는 주체로 살고 있는가? ‘좋아요’를 받고 싶은 욕구 같은 얄팍한 표면 말고, 더 깊게 파보면 그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가닉미디어 1에서 다룬 것이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전체 지형이었다면 2에서는 이 연결을 만드는 주체인 ‘나’에 집중하려고 한다. 연결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 연결을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이며 그 결과 우리는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느 분야든지 매일 배우고 새롭게 습득해야 하는 시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일과 생각이 데이터로 연결된 이 세상에서는 서로의 영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세상 변화의 속도도 이에 따른다. 테슬라와 블록체인이 가져올 것이라던, 믿기 어려웠던 미래가 벌써 우리 앞에 와있고 기존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 중이다. 예전에는 언론이, 학교가 정보와 지식의 생성과 교육의 역할을 맡았고 제도권 안에서 삶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비교적 안심했다.
그러나 전통 미디어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적 괴리와 불신을 만드는 대표적 존재가 되었고 학교도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메타버스, NFT 등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개념들이 왠지 나를 도태시킬 것 같다. 하지만 기술의 진화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조직, 가치, 기술, 시장의 관점부터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작동원리가 변화하고 있지만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시간은 도무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가? 앞으로 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살아 숨 쉬며 만들고 있는 오늘은 무엇인가?
풍요의 세상이 왔다는데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더 늘어난다. 인간이 이끌어온 생태계는 점차 파괴되고 인류는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생사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염병과도 공생 중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세상은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열심히 일할수록 상품도, 콘텐츠도, 광고도, 마케팅도 넘쳐나고 진짜 정보를 가려내기 위해 더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의술의 발달로 거뜬해진 백세 시대에 환경 호르몬이 만드는 암환자 숫자는 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회는 분열되고 작고 폐쇄적인 그룹들로 파편화되어 소통은 어려워졌다. 세상은 편리해졌는데 나는 고립되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가치를 풍요로움에 맞추라고 유혹한다. 쓰고도 남을 돈, 먹고도 남을 음식, 입고도 남을 옷들로 넘쳐야 성공인 줄 알았는데 그 결과 우리가 받은 성적표는 참담하다.
이 책은 불편하다. 연결의 주체인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 위한 초대장이다. 깊은 곳까지 함께 들어가 보자. 그 뿌리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돌릴 수 있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왜’ 즉 ‘존재 이유’들이 뿌리째 연결된 근원으로 가보자. 단 한 생명의 발견이 곧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왜”를 찾고 그 뿌리에서 존엄하게 연결된 잃어버린 우리를 발견하는 여정이 되기 바란다.
첫 책이 나온 후 노상규의 책 오가닉 비즈니스, 이어서 2017년 나의 책 오가닉 마케팅을 출간하고 많은 독자를, 비즈니스 주체를 만났고 우리의 관점을 적용한 실험실들도 성장했다. 여기에 4년 여 운영해온 커머스 플랫폼 ‘프롬(from.kr)’을 통로로 만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일기를 보았다.
‘왜’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개인에게도, 기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금까지는 이익을 내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이유였다.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시장의 논리에서는 무력해진다. 기업이 제품을 생산했고 왜 사야 하는지 광고했고 유통 체인을 통해 배포했다. 그러나 시장은 변했고 더 이상 이 원리가 동작하지 않는다. 착한 기업이 유행이 되고 기업 내 ESG 부서와 예산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시스템이나 전략을 바꾼다고, ESG (Environmental/Social/Governance)경영을 한다고 조직이 바뀌지 않는다.
본질적인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 없이 고객이 참여자 즉 직원이 될 수 없고, 고객이 직원이 아니라면 기업은 살아있는 유기체로, 네트워크로 성장할 수 없다. 무한규모의 경제학으로 전환된 시장의 패러다임은 기업이 만든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무한한 성장의 중심에는 회사 CEO 대신 한 명 한 명의 고객 즉 직원처럼 일하는 참여자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기차를 만들어서 비싸게 파는 게 목적처럼 보이는데 10년 동안 테슬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존재이유’로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2023년 한해동안 이에 대한 글을 찬찬히 올리고 수업도 이어갈 예정이다. 여기서는 테슬라에 대한 수많은 오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전 인류의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 하는 것, 이를 위해 공장을 짓고 전기차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만들고 배터리를 만들며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력한 ‘왜’에 따른 일관된 실행이 가져오는 결과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 과거의 관점으로 읽을 수 없는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슬라의 직원되기를 자처하는 운전자, 테스터, 분석가, 기자, 마케터가 된 수천만의 고객 커뮤니티가 그 결과다. 이들이 만드는 가치가 기업이 가는 길을 입증하고 성장시킨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존재 이유와 실행이 일치한다면 의사결정은 단순해진다. 전통적인 마케팅 부서가 필요 없어진다. 부풀려 얘기하거나 우리 회사에 이로운 정보만 간추려 왜곡된 정보를 만드는 데에 돈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그 시작이 ‘왜’에 있다. 이 단순한 질문이 자신의 삶을, 주변을 바꾸고, 균열을 만들고, 세상을 바꾼다. 거대한 기업도, 나 한 사람의 삶도 동일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다소 불편한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왜 일하는지, 가치란 무엇인지, 우리는 왜 가면을 필요로 하는지, 나는 자유로운지, 나는 ‘온리원'(대체 불가능한 존재)인지, 생명체의 원리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나’는 개인이기도, 기업이기도 하다. 앞서 출간한 오가닉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에도 전략적 사고의 나열, 무엇 무엇하는 방법, 몇개의 정답을 적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수익을 내자고 그럴듯한 문장을 뽑아내고 더 두꺼운 가면을 쓰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의 ‘왜’는 강력하다. 그 여정은 고통스럽지만 세상의 변화가 바로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