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은 진돗개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단다. 워크숍에서 내 역할은 질문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정한 답을 본인이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누군가는 살을 다 발라내고 생선뼈만 남는 과정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정도면 충분히 나온 것 같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며 황급히 마무리를 시도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도망갈 문을 찾는다. 진심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99도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대부분은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질문자인 나를 설득하기 위한 답을 한다. 스스로도 그것이 답이라고 믿고 있다. 그 논리적인 답들이 스스로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문고리를 찾으며 피하고 싶은 고통의 시간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찾아가는 것이 'Why'다. 질문이 이어지다 보면 한 단계씩 더 깊이 내려간다. 답을 찾은 것 같지만 그 밑에는 한 겹이 더 있다. 그 한 겹을 더 벗겨내고 한차례 더 답에 가까워진 것 같지만 끝이 아니다. 계속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본래 던져야 할 질문, 발견해야 할 문제에 다다른다. 그렇게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가면을 한 겹씩 스스로 벗으면서 진정한 '왜'를 스스로 찾아내게 된다.
보통은 우리 회사의 존재 이유, 나의 일, 해결해야 할 문제 등에서 시작하는데, 바로 이런 과정 때문에 어김없이 가면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리 치료 시간도 아닌데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내가 가면을 쓰고 있다니 내내 불편하고 싫을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문장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다음에는 가면이 왜 내 얘기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고, 그다음은 기분이 나빠진다. 스스로 ‘왜’를 명확하게 찾게 되는 순간까지.
보통 가면은 나의 본래 모습과 의도를 상대방에게 숨기기 위해 필요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쓴다. 그런데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을 향해 있는 가면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가면이다. 내가 거울처럼 바라보고 나 자신으로 인식하는 가면이다. 그래서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안다고 믿어온 것, 믿어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직면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앞으로 갈 수 있다. 그 첫번째가 나 자신에 대한 인식, 내가 세상을, 관계를, 나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막고 있는 내 가면이다. 이 글은 그 가면에 대한 인식을 돕기 위해 쓰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로 태어난다. 모두가 각자의 본성을 지닌 개체로 세상에 나온다. 눈을 뜨고 가족을 만나고 사랑을 배운다. 친구를 사귀고 학교를 가고 직장을 찾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열심히 살아간다. 집도 장만하고 승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 앞의 윤택한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곧 정년이다. 노년까지 살아갈 수 있는 자금을 세어본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잘 누리고 잘 죽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삶의 여정은 거의 유사하다.
이 순서가 한 인생의 평균이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열심히 살아온 삶이 그런대로 아름다워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아이도 없고 내 경우는 다르다고 하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가면이라는 주제를 통해, 모두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 왜 사회적 평균값을 기준으로 고군분투하며 살다가 죽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그 단면을 좀 더 상세하고 세밀하게 낱낱이 들춰 보려고 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쓰고 있지만 나와 하나가 되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가면의 실체가 드러나기까지.
우선은 도대체 무엇을 가면이라고 하고 있는지 종류부터 몇 가지 살펴보자. 글로 정리를 하다 보니 가면의 종류만으로도 책이 한 권은 필요하겠다 싶다. 하지만 우선은 이 불편하고 어려운 주제를 공감하고 끝까지 읽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우선 간단히 예시를 살펴보고 우리가 가면을 다루게 된 이유, '가면의 양면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왜 가면이 필요한지, 세상의 작동원리에 대해, 그리고 가면을 인지함으로써 시작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아래 가면들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인 나도 쓰고 있다. 여기서는 가면의 예시와 속성에만 집중하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 글에서 차분히 정리하기로 한다.
모두에게 친절하다. 그런데 친절하려고 애쓰는 만큼 스스로 고갈된다. 겉과 속이 같다면 스스로 고갈될 이유도 없다. 더 채워진다. 나서서 청소하면서 채워지고 쟤는 왜 돕지 않나 화가 나지도 않는다. 나는 이렇게 친절한데 쟤는 왜 고마운 줄 모르나 서운해할 이유가 없다. 겉과 속이 같으면 착하니즘 가면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선한 행위가 (종교집단에서처럼) 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경우는 다르다. 위선, 즉 선을 가장한 이기심이라는 평판을 듣지 않도록 철저하게 써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도 속이고 나도 속을 만한 착하니즘 최면이 필요하다. 세상을 향한 선함과 나를 속이는 위선 사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거절이 제일 어렵다. 어려운 일이든 할 수 없는 일이든, 시간이 있든 없든, 일단은 모두 떠안는 사람들이 쓴다. 이 가면은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성품도 선해서 없는 시간도 쪼개서 할애해 주고, 상대방이 요청하는 모든 업무를 프로페셔널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하지만 예스 가면 입장에서는 다른 옵션이 없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또는 “예, 알겠습니다”로 일단 답하고 혼자 수습하기 위해 힘들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 상황을 대면하거나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계약이 어려울 수도 있고 상사나 고객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의 요구는 이때 정당화된다. 무엇보다 상대방은 당사자가 ‘예스’를 할 수밖에 없음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 스스로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켜지지 못할 '예스'가 시간에 쫓기다 보면 나의 의도와는 달리 거짓말이 되는 것을 인지하기 어렵다. 가면을 상대방을 향해 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보고 있는 거울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서점에 가면 쏟아져 내리는 위로의 책들이 이 가면이 옳다고 부추긴다. 무엇이 괜찮은가? 남들도 나처럼 힘들어서 괜찮은가? 직장 생활의 어려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녀로 살아가는 스트레스, 지치고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반창고라도 있는 것인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속이는 가면이다. 왜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고 있는지 가면을 만져보아야 한다. 왜 무엇을 위해 인내하며 반창고에 의존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본질적인 질문을 찾아야 한다.
이 가면은 비싸다. 돈으로 사회적 명예를 사야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자선 또는 필란트로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부를 드러내고 사회적 존중도 얻는다. 자선(charity)과 필란트로피(philanthropy)1 등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범주에 있다. 무조건으로 내어주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남을 돕는 비중과 나를 돕는 비중 중 어느 쪽이 큰가? 전자라면 내가 돕고 있다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한다. 겉과 속이 같은 경우다. 반면 나를 돕는 비중이 더 큰 경우라면 꼭 써야 하는 가면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돈만 낭비하고 사회적 존중 따위 대가로 얻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자주 등장하는 필란트로피는 인류의 발전과 정의를 위해 조직화된 기구 등에 돈을 기부하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부터 세계적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커뮤니티처럼 인식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The Giving Pledge).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일부러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한 선한 의도인가,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 결과적으로 나를 돕기 위함인가? 후자라면 가면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순전한 선함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욕구 충족의 상태를 말한다.
상사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라고 믿는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사도 그렇게 믿고 있고 심지어 나도 그렇다. 회사에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지 않고 상사를 위해 일한다. 그의 칭찬이 내 존재감이다. 그런데 단순히 승진을 위해 눈치를 보는 정도보다 심각한 가면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없는데 있는 것처럼,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 스스로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그때 등장하는 가면이다. 내가 가면과 하나가 먼저 되면 상대방을 속이는 것은 쉽다. 적어도 가면의 유효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주어진 역할이 내 이름표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의 등장인물인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말하는 관점이 아니다.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경우다. 대표는 대표다워야 한다. 무거운 책임만큼 권위도 있어야 하고, 말이며 행동이며 옷이며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거기서 벗어나면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교수다워야 하고, 학생다워야 하고, 목사다워야 하고, 나 자신 말고 "나의 역할다워야" 한다. 처음에 익숙하지 않을 때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만 점차 가면이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나는 없고 역할만 남는다. 이 가면이 내게 말한다. 겉과 속은 원래 다른 것이라고,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이고 투명한 것은 불편한 것이라고 내게 말한다.
가면에는 양면성이 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이 양면으로 존재하는 가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여기서 필요하다. 보통 가면은 나를 감추기 위해 쓴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며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인식하고 있는 가면의 정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할 가면은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옷이 될 수 있다. 역할 수행을 위한 제복, 태도, 규범 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칙을 돕는다.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가면의 안쪽이다. 밖에서 보는 가면이 아니라, 내가 보는 내 모습이다. 위에서 예시로 언급한, 그리고 수없는 예시가 더 남아 있을 저마다의 가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 자신을 설득하게 된다. 내 안으로 파고 들어 '나'가 내가 보고 있는 지금 그 모습,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가면이 표피가 아니라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쳐 나와 하나가 된다.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왜 우리 스스로에게도 가면이 필요했을까? 저마다 유일한 존재임을 모르거나 숨기고, 스스로 부정하고,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이 오늘 내게 있기 때문이다. 본래 유일한 존재인 내 신분은 모두가 인정하는 비슷한 삶의 여정을 걷기 위해 철저하게 숨겨진다. 가면은 모두 쓰고 있지만 도무지 알아채기 어렵다. 너무 강력해서 남을 속이는 것은 기본 기능이고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완벽하게 동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겉모습은 어느새 내가 되어 있다. 피부와 하나 되어 도무지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대로 편안하다.
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도구인 가면은 이제는 나 자신이 되었다. 그래서 돌이키기가 어렵다. 가면은 사회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와 함께 자란다. 칭찬받기 위해 공부하고, 마일리지를 쌓는 마음으로 교회에 간다. 가족관계, 동료 관계, 사회관계가 모두 노력과 보상의 관계처럼 인식된다. 노력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노력으로 힘을 쏟으며 공부하고 일하고 기부하고 교제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의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를 인지하는 우리는 아주 오랜 기간 다양한 방법과 수단, 합리화, 경험과 타협으로 가면을 만들고 기능을 향상시켜왔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명이 기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결국 우리의 본래 모습과 세상의 작동원리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가면은 더 두터워지고 나도 가면 속에서 더 편안함을 누리게 된다. 나도 그랬다.
기업 워크숍에서 회사의 존재이유와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논의하는 과정이든, 새로운 삶의 길을 찾는 사람이든, 꽤 오랜시간 머릿속에 주입되어 온 것이, 점차 익숙해지고, 스스로 믿게 되고, 그 과정이 우리를 바꾸게 된다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다.
본인이 전심을 다해 찾고 싶은 그 진실된 답을 위한 치열한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을 내려 놓아야만 하는 시간에도 내면보다 가면의 언어로 말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하나가 된 가면은 어느새 나와 뗄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오랜 기간 쓰고 있던 가면으로 본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놀랍게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 찰나를 지나면 문제는 굉장히 쉬워진다. 'Unlearn(배워온 것을 비우기)'의 시간은 어렵지만 그 다음은 온전히 본래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채비가 이미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의 시간보다, 생산에 집중해왔다. 평생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해왔다. 지구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간 대신 내 편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내 것으로 소유하고, 사회가 규정한 모범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는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 첫째는 본래의 나에 대한 '발견'이다.
세상으로부터 주입된 것, 주변으로부터 합의되고 강요된 것, 나도 모르게 믿게 된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 배운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다. 내가 갖고 태어났지만 보지 못한 것, 내가 마주한 대상에게 있지만 내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 그래서 계속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시간동안 고갈된 나 자신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면화되어 나를 먹어버린 가면이라는 불편을 주제를 다루게 된 이유다. 고상하고 철학적인 인식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찰나는 매우 실제적이다. 그후에는 들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다. 그 힘이 이미 내안에 있다.
지금부터 어떤 과정을 통해 각자 각종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가면이 편하면 편해질수록 왜 속박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유일한 존재인 나와, 세상이 정의하는 나 사이의 불협화음을 여러분과 함께 듣고 싶다. 그 순간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과 내 안에서 시작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다 읽어갈 때 즈음 가면이 매우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가 본래의 나, 유일한 존재로 태어난 나를 인지하는 지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자유의 박탈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았다. 자유는 체계로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 자유로운 내가 깨우는 한 사람, 그 사람이 깨우는 커뮤니티가 체계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혁명이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