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변치 않는 건 변한다는 사실밖에 없다.
휴식을 취하려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수하게 담겨있다. 사진을 통해 매일 일상을 업로드하기도, 영상을 찍어 생생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너도 나도 SNS를 만들고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다. 자신을 많이 어필하고 알리는 행위가 ‘잘 살고 있고’, ‘열심히 살고 있음’을 입증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종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이나, 드문드문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궁금해진다. 이들이 가끔씩 나타날 때면 신비로움을 느끼고 존재감이 더 뚜렷하게 각인된다. 이게 바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일까? 어렴풋한 나의 지레짐작과 함께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희귀한 요즘, 보이지 않음에 대한 본질과 의미가 궁금해졌다.
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대화를 하는 것이 심리치료 못지않은 효과를 내는 경험도 했다. 백살이 넘자 노환으로 점점 말을 못하게 된 지인을 모시고 시골길을 드라이브하곤 했었다. … 그리고 내가 쳐다보지 않을 때 생각을 가다듬어 천천히 말을 잘 이어가셨다. p.93
책에서는 ‘보이지 않음’에 대해 다방면으로 파헤치고 해석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예술 속에서, 역사에서, 작가의 논리에서 보이지 않음의 가치는 굉장히 컸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작품 속 공백에서 큰 매력을 느꼈고, 눈을 맞추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편하게 잘 털어놓았으며, 보이지 않아 알지 못하는 것에 안심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보이지 않음’의 가치를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난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니 상대와 눈을 맞췄을 때보다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나눴을 때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툭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이 편안했으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 우리 심리 상태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개인의 정체성을 가리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면서 전통적인 조직의 위계질서를 비난하는 게 더 과격하고, 더 충격을 주고, 아마도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 익명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희생시키기보다 재창조할 틀을 제공한다. p.227
개개인의 존재보다 하나의 큰 집단이, 개방성보다 익명성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데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당장 가까이에서 접하는 소셜미디어에서도 익명의 모임과 익명의 단체들에 우리는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같은 뜻을 가진 익명의 군단들은 더 큰 힘을 받고 외부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는다.
실명보다 익명의 목소리가 더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SNS에서 사람들은 익명의 힘을 빌려 더 솔직하고 더 거리낌 없이 마음과 생각을 표출한다. 그리고 이 익명의 목소리는 엄청난 주목을 받고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익명과 집단’은 부당한 것을 고발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타인을 휘두르고 아프게 하는 부정적인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언제나 자아에는 핵심적인 본질, 어마어마한 흔들림이나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바뀔 수 있는 단단한 기반암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갈, 돌 더미와 함께 모래, 진흙, 광물 등이 뒤섞여 쌓인 충적토로 이해한다. 이 모든 게 비와 눈, 얼음, 기온, 날씨, 시간과 그 자체의 온갖 고유한 특성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시시각각 끊임없이 변화한다. p.279
‘존재’라는 단어를 깊게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사회와 세상에 알리고 각인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행위들에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흔들림 없는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뚜렷한 자아를 만들고자 했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변해간다는 문장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존재의 집착으로부터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작가인 대니얼 길버트는 “우리 삶에서 변치 않는 건 변한다는 사실밖에 없다” 고 말한다. 매순간 지금도 우리는 사라지고 있고 아까의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은 만날 수 없다. 변치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두려움 등의 감정을 내려놓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사라진 나의 모습들이 잘 섞여서이고, 내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채울 수 있는 이유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왔기 때문이다.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고 있다.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이 이 책의 묵직한 제목을 여러 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