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상 Apr 21. 2018

2000여 명의 거룩한 뒷모습

대학원 수료 후 첫 면접이 잡혔다. 큰 규모의 방송국. 서류부터 탈락하던 곳이 태반이었는데 이곳은 한동안의 파업 때문인지 파격적인 인사정책의 변화로 무조건 면접을 보게 해준단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에 대한 희망보다는 2000여 명이라는 숫자에 압도당한 채 아침을 맞았다. 첫 면접이니만큼 메이크업을 받고, 예상된 고행을 자처해 따라온 엄마와 함께 공항지하철을 탔다. 틈틈이 면접 준비에 열을 올리던 나의 투정과 예민함을 엄마는 묵묵히 받아주었다. 언젠가 꼭 오고 싶었던 디지털영상미디어시티의 즐비한 건물들 한 가운데 나의 면접장이 존재했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열심히 준비해 어떤 이는 가까운 곳에서, 어떤 이는 매우 먼 곳에서부터 큰 꿈을 품고 왔을 터였다.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면접 시간이 됐다. 2000여 명이다. 그 숫자를 이길 운빨이 애초에 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향하는 면접장이었다. 면접자들과 올라탄 투명한 엘리베이터 아래로 엄마의 채 가리지 못한 희끗한 윗머리와 희뿌옇게 바랜 갈색의 코트가 보인다. 방송국의 정제된 듯 냉정한 기류 사이로 모정이 보인다. 그녀를 바라보자 갑자기 울컥 뭉클한 그것이 나의 가슴을 비집고 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이미 예상된 결과를 그녀를 위해서 바꿀 수만 있다면…! 수험번호의 순서에 맡게 줄선 이들은 어느 집에서나 다들 대들보 역할을 할 것만 같은 늠름한 모습들이다. 한 벌씩 빼입고 집 밖을 나올 적에는 각기 부모들의 응원, 포옹 그런 것들이 있었겠지…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진행자의 말소리에 맞춰 수험번호에 맞게 앞뒤의 사람들을 확인한다. 1차 대기 장소, 2차 대기 장소… 점점 말라가는 입술과 경직되는 표정들. 복도를 꽉 메운 사람들. 그들 오른편으로 보이는 창문. 사람들은 마지막 대기 장소 앞에서 다들 그곳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이라곤 겨울의 빈 나뭇가지와 공사장의 크레인뿐일 텐데도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과 소중한 이들과 지나온 시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마지막 장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기문 앞에서 등허리를 곧추세우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시간. 기다리고 준비한 시간은 길었는데 보여줄 시간은 채 5분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운명이 결정된다.

‘불합격’     


2000여 명의 거룩한 뒷모습.

그들은 모두 한 집안의 대들보 같은 존재일 터였다.

누구나 자랑하고 싶은 존재, 어디선가 인정받는 존재.

오늘 그들은 양복을 빼입고 저마다 가장 예쁘고 멋진 숙녀이자 신사가 된다.

하지만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햇병아리 유치원생만 같다.

다만 지금은 취업전선이라는 무지막지한 산에 온 것만이 차이일 뿐.

누군가는 뚫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될 수 있을까?

어른이라서 두렵다고 울지도, 떼쓰지도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여태까지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짧다. 그리고 취업이 되기까지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필요할까? 적당한 타협? 아니면 꾸준한 시도? 그도 아니면…? 우리의 시간은 왜 이곳 즈음 꼭 한 번 멈추는 것일까?      


2000여 명이 지원했다. 난 첫 면접이고, 그러니 안 될 가능성이 높다고 수십 번을 말했건만 왜 엄마는 어김없이 기대를 하고 나야말로 왜 또 다시 실망하는 걸까? 아니, 나의 숨길 수 있는 실망보다는 엄마에게 전했을 때 드러나는 진실이 싫다. 그 진실로 가슴 아플 엄마를 슬프게 만드는 나의 초라함이 싫다.

내가 부족해서일까? 구멍이 너무 좁아서일까?

이 끝엔 무엇이 존재할까?

결혼도, 육아도, 효도도, 여행도…

당장은 취업이 문제구나, 취업이…    


깔끔쟁이인 엄마는 그날 밤 세수도 않고 곤히 잠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라는 작은 존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