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어 배우기, 한국어 가르치기
언어에 대한 생각
언어에 대한 갈망은 곧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여행자로서 느끼는 소통의 욕구는 여행의 불편함을 없애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좀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관계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나 위주다. 내가 덜 불편하면, 내가 상대의 정보를 조금 더 알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상대가 나를 더 깊이 있게 알아주면 좋겠다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자의 정체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고 나면 사람이 알고 싶어지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고 관계의 더 나아감이다. 그리하여 언어가 그 관계를 이어주고 그 관계가 다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여행자의 정체성을 넘어선 무엇을 바라게 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천천히, 천천히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때만큼은 정말이지 크메르어를 잘하고 싶고, 또 그만큼 나와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게 만들고 싶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간절하게…….
가끔은 크메르어를 배우는 것에 불편함과 함께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공부에 대한 부담일 수도 있고 또 이어지는 평가에 대한 부담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가 만들어낸 핑계일 수도 있다. 나처럼 한국어를 가르치는 경우는 현지어를 쓸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사무실에서 한국인 봉사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고 또 코워커 역시 한국어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의식적으로라도 아이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가급적 한국어를 쓰는 것이 맞다. 일정 부분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말이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 아이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면 불완전하지만 한국어로 소통을 하는 것이 좋다. 그 과정을 거침으로써 한국어 실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말이 현지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관계가 좀더 가까워지고 그래서 아이들과 좀더 내밀한 이야기, 그들의 꿈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들이 한국어학과에 입학을 해서 4년 동안 공부를 해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수준이 되지는 않는다.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한 정도일 뿐이다. 당연히 봉사자 역시 그러하다. 아니, 어쩌면 봉사자들의 현지어 수준이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봉사 기간 1년, 연장을 해서 2년을 근무한다 하더라도 속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지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게다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경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소통을 바라고 있다. 좀더 나은 소통을, 좀더 나은 관계맺음을 말이다. 단순히 말을 가르치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고 한 걸음 더 그 아이의 삶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른 방식의 통로를 만들어야 하는가, 다른 방식의 관계맺음이 필요한가?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든다. 편지 주고받기? SNS로 소통하기? 그러다가 나는 내가 현지어를 배울 때 어떠했는지,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 한국어를 가르칠 때는 또 어떠했는지 당시의 기록과 기억을 되살려 정리를 해 보았다.
현지어 심화학습
2학년 역시 규정된 수업 시간이 모두 끝났다. 그래서 3학년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크메르어 방송을 듣고 그것을 한국어로 옮겨 적는 수업을 했다. 아이들은 무척이나 진지했으며 또 흥미를 가지고 수업에 참여했다. 2학년임에도 3학년 아이들만큼 하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이런 수업은 내게도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 사실 강원도 영월에서 국내교육을 받을 때, 그리고 캄보디아에 와서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크메르어를 배웠다. 나는 선발과정이 모두 끝났을 때 후보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가 국내교육이 시작된 이후에 추가로 캄보디아로 배정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집합교육 전에 받는 온라인 교육은 거의 받지를 못하고 영월 교육원에 입소를 했다. 다른 단원들은 온라인 교육을 통해 이미 크메르어를 접하고 공부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해서 들어도, 수업을 마치고 따로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해도 크메르어 실력은 크게 늘지 않았고, 동료 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수업 진도를 맞춰 갈 수 있었다.
크메르어는 문자 자체가 어렵다. 자음 모음의 개수도 많을뿐더러 생김새가 비슷한 문자들이 많아 그 글자를 익히고 그것으로 음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도 다들 어려워 했는데 내가 더 심했던 것이다. 국내 교육이 끝나고 캄보디아로 오기까지 약 한 달 정도 나는 단어나 문장을 듣고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공부를 했다. 당장에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나는 내가 공부한 방식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급함 때문이었다. 파견이 되면 바로 소통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자음, 모음을 확실히 익히지 않고 간단한 회화를 듣고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공부를 했던 것이다. 언어교육을 전공했다는 내가 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기도 했다. 어렵더라도 자음과 모음을 익히고 그것을 결합하여 음절을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면 이어지는 공부는 훨씬 쉬워졌을 텐데 말이다. 처음 현지어 공부를 할 때는 늦게 시작했다는 것 때문에 기본을 무시하고 바로 실용적인 부분으로 접근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학습 진도를 더 느리게 한 것이다. 조급증, 그것이 조급증이라는 생각을 깊게 하지도 않은 채 나는 캄보디아로 갔고 현지적응교육을 받기 위해 매일 왕립프놈펜대학교(RUPP) 안에 있는 캄한협력센터(CKCC)로 갔다.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배정한 것이 현지어 교육이었다. 그래서 매일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현지어 교육을 받았다. 두 분 선생님은 비에스나 선생님과 나이후이 선생님이었다. 두 분 모두 여자 분인데 한국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또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는 분들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두 분 수업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 자체가 힘들어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러했다.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 이렇게 여덟 시간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내용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업.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틈 나는대로 크메르어 자음과 모음을 외우려고 했고 그것을 결합하여 글자는 만드는 연습을 해 보았다. 정말 쉽지 않았다.
5주간 진행하는 현지적응교육 때 코이카 캄보디아 사무소에서는 현지어 심화학습을 위해 튜터와 일대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를 담당한 튜터는 현지인으로서 한국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남자였다. 5주 간 받는 현지적응교육 안에 튜터와 하는 공부를 마쳐야 하니 매주 주말 다섯 시간 정도를 공부해야 했다. 주말까지 현지어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도움이 되긴 했다. 처음에는 CKCC에서 배우는 교재를 중심으로 공부를 했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현지인 튜터가 선교사가 만든 책이라고 하면서 캄보디아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책을 소개해 주었다. 5달러를 주고 책을 제본한 뒤 그 책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했다. 그때 나는 튜터 선생님에게 캄보디아어 자음 모음부터 시작해서 음절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쓰는 순서 등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내가 바탐방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데 지금의 나처럼 글자를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까막눈이 되도록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4학년까지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배우기 때문에 까막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크메르어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겨우 말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수준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 쉽지는 않았다. 우선 튜터는 가르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어와 캄보디아어를 읽고 쓸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음절 구성의 원리에 대해 물어도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제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의 진척은 있어서 아주 간단한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게 되긴 했다.
하지만 현지적응교육이 끝나고 2월에 바탐방으로 오면서 현지어 공부가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코이카 사무소에서는 임지에 부임한 단원들에게도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 현지어 심화학습을 할 수 있도록 튜터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처음에는 현지어 공부가 크게 필요하지 않을 듯해서 심화학습 신청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학교 관계자와 논의를 할 때 현지어나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을 하게 되면서 영어로 크메르어를 배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현지어 심화학습을 신청했다. 그리고 영어가 능숙한 현지인을 코워커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현지어 배우기, 쉽지 않았던 여정
저녁 여섯 시 십 분, 학과 사무실에서 튜터를 만났다. 그 자리에 장선생님, 백선생님이 함께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 튜터와 공부하기로 했는데, 거기에 장선생님이 붙고 갑작스럽게 오늘 백선생님이 결합을 하게 된 것이다. 적당한 튜터를 구하지 못해서다. 혼자서 세 명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튜터를 만나보고 결정을 하기로 해서 같이 만났다.
선교사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튜터 ‘Sea Navy’는 국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바탐방대학교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젊은 여성이었다. 튜터가 하는 일이 바쁘고 또 저녁에는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고 해서 세 사람 모두의 시간을 짜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튜터가 태권도 배우는 시간 일부를 포기하고 또 우리도 각자 예정하고 있던 시간을 바꿔서 겨우 시간을 맞추긴 했다. 나는 원래 토요일에 다섯 시간씩 하는 것으로 계획을 했고 튜터와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혹시 주말에 여행을 한다든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 수업을 못하게 되면 주중에 보충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말에 공부 일정을 잡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 아예 주중에 현지어 공부를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현지어 심화학습을 신청하지 않으려 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는 현지어보다 한국어를 써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고 일상이 바빠질 때 현지어 배운다고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여기 와서 보니 현지어를 못하는 답답함보다 영어로 소통을 할 수 없는 답답함이 더 컸다. 그건 OJT 행사 때부터 느낀 것이다. 현지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소통을 할 때 여기서는 대부분 영어를 사용한다. 대학교 학부장도 영어로 우리와 소통을 하고 식당이나 카페 종업원들도 대부분 영어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한다.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차야게스트하우스를 관리하는 아주머니도 영어로 우리와 소통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지어 심화 학습을 할 때 영어 공부를 같이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즉 현지어 설명을 할 때 영어로 하면 현지어와 영어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지 않겠냐 생각하고 신청을 한 것이다. 튜터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다. 크메르어를 공부할 때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설명을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그렇게 하겠단다. 자기 역시 한국어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아직 한국어가 많이 서툴러서 영어로 하는 것이 편하단다. 현지어를 영어로 공부하는 것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일단은 해 보기로 했다.
학교 수업은 오전에 모두 끝난다. 7시에 시작하는 1교시 90분 수업을 마치고 20분 쉬면 8시 50분부터 2교시 90분, 10분 쉬고 10시 30분부터 3교시 90분 수업이 이어진다. 열두 시에 3교시 수업을 마치면 학교 밖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는다. 아이들은 12시에 수업을 마치고 대부분 집으로 간다. 특별한 경우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춤이나 노래를 연습하는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가 많지는 않다. 나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현지어 심화학습을 위해 튜터를 만나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시내에 있는 카페 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같이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튜터와 현지어 공부를 하던 어느날, 튜터가 근무하는 교회의 목사를 식당에서 만났다. 한국인 목사였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목사도 그렇게 인사를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뒤 튜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공부를 계속 하기 어렵다는 연락이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교회 목사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 순간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공부하는 시간은 튜터가 교회 일을 하지 않는 휴무일이거나 튜터의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교회 목사가 그 시간에 대해 간섭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튜터도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심지어 교회일을 계속 할 것인가 하는 고민까지 한 모양인데 결국은 교회 목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같이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미 코이카 사무소로부터 튜터비를 받은 상황에서 튜터가 계속 할 수 없다고 하니 난감했다. 그녀는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후배 한 명이 영어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같이 만나보자고 했다. 시내 카페에서 만났을 때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튜터의 후배는 부족하지만 해 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같이 공부한 튜터는 새로 만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구해보겠다고 하면서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내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내 영어가 한국어 도움 없이 소통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튜터가 소개해 준 후배와 공부를 하겠다고 했고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두 번 만나 같이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카페에서 만나 공부를 했지만, 4월이 되어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12시에 자전거를 타고 카페로 가는 것이 끔찍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튜터에게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한낮에도 이동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그 이후에는 학교 안에서 튜터를 만나 공부를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두 번째 튜터가 시엠립에 있는 세종학당 일을 하게 되어 바탐방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아직 해야 할 공부 시간은 절반 정도 남았는데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국어학과 코워커에게 부탁을 했다. 영어로 크메르어 배우는 것을 포기하면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튜터이기에 그렇게 했다. 또 같은 사무실에 있으니 좋은 점도 많았다. 시간이 날 때 언제든지 같이 교실로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현지어 심화학습, 7월이 되어서야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