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지역에서 다니던 교회에 성품으로나 인정으로나 내가 마음속으로 높이 사던 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자그마치 네 명이나 다 키워낸 분이어서 그분이 해 주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려고 했다. 그분이 인도자가 되어 주마다 1회의 정기 소모임을 했었는데, 그 모임이 때마다 얼마나 기다려졌던지! 7살, 4살 두 아들을 연고지 하나 없는 타지에서 키우고 있던 나를 그분은 언제나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아니, 고만고만한 비슷한 또래의 자녀들을 둔 엄마들이 그 모임의 구성원이었는데, 그 엄마들 모두를 다독여 주는 분 같았다.
주마다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집을 오픈하며 모였는데, 집주인 엄마는 간단한 다과 등의 음식을 마련해 놓고는 했다. 어떤 엄마는 과일과 차를, 어떤 엄마는 달콤한 쿠키와 커피를, 어떤 엄마는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또 다른 엄마는 만두를 쪄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집에서 모일 차례가 되면, 나를 포함한 엄마들더러 아이 키우느라 제대로 못 먹을 때가 있지 않느냐면서 한우 샤브샤브를 한 상 가득히 준비해 주었다. 샤브샤브를 고기만으로 배가 터질 만큼 먹은 건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이 어느 맛집에 다녀온 뒤면 그 음식맛을 흉내 낼 수 있겠다면서 그다음 차례에는 아주 맛있게 들었다는 음식을 솜씨 좋게 차려 모임에 내놓았다. 인도식 카레와 난을 그때 처음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그분이 알려 준 대로 집에 가서 만들어 봤지만 그분의 음식과는 멀고도 먼 맛만 날 뿐이었다.
음식 하는 걸 워낙에 즐거워하고 또 월등한 음식 솜씨를 지닌 분이라, 더욱이 자녀 넷과 남편, 그리고 시아주버님네 가족과 시어른까지 모셨어서, 많은 양의 음식을 장만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하긴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수월한 것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대접할 때는 수월하지 않지 않나. 내가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겠나 싶은 게 대접받을 때마다 울컥했다.
해 주는 말씀마다 조용조용 차분하면서 진심이 어렸는데, 그 속엔 나를 향한 응원과 격려, 용기의 말들이 늘 있었다. 모임이 있기 전날 두 아들을 모질 게 훈육한 게 마음에 걸려서 가슴 아파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그래도 잘 자랄 거니까 마음 추스르고 아이들이 기관에서 돌아오면 꽉 안아 주라고. 남편과 마음이 안 맞아서 답답해하면 당신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신 남편보다는 내 남편이 덜 할 거라고. 당신 남편의 험담이라는 게 코흘리개 순딩이 아이들의 티격댐 같아서 내 남편 때문에 콱 막혔던 내 가슴은 그분의 얘기 덕분으로 웃느라 뚫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육아와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하고 참으로 좋아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나 남편과 좌충우돌 부딪히는 나를 향해서 육아 선배라며 질책하거나 섣부른 조언을 하려기보다 모임의 엄마들의 얘기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는 그분이 엄마들을, 나를, 내 마음에도 안 들던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같아서 편하기 그지없었다.
"인도자님, 주양육자라고 해 주세요. 말씀 중에 쓰시는 '엄마'라는 표현을 모두 주양육자로 바꿔야 맞는 것 같아요."
여느 때처럼 모임을 이끌면서 자녀 양육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고 있던 그분한테 내가 갑자기 제안한 거였다. 모인 사람이 모두 어린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었기에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 줄 수 것들을 얘기하던 그분이 순간 당혹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내 요구대로 해 주었다. 엄마인 내가 양육의 대부분을 맡고 있던 그때의 상황이 불만스러웠던 때에 그분의 말속에 계속 등장하는 '엄마'라는 단어는 불만스러운 내 형편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에게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늘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았던 그분에게, 내 속내를 속으로만 읊지 않고 입 밖으로 내었다. 세상 둘도 없이 편한 분에게 나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받아주실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5년도 더 된 이 일을 떠올리게 된 건 그 분과 계속 연락이 닿은 채로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연락이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다가였다. 이전 지역을 떠나 지금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도 뜸하게나마 몇 번을 그 모임에 참석했다. 운전해서 1시간이면 되는 거리밖에 되지 않기에 절로 자연스럽게 멀어질 때까지 참석하고 싶었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며 인생의 참 벗으로 지내고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퍼뜩 드는 생각 하나. 나는 그분의 인자한 시선이 닿는 곳이 세상 어디보다 편했는데, 그분은 나를 편하게 여겼을까. 내가 편하게 느끼는 상대에게 나는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나는 그분을 그분의 모습 그대로 끌어안았었나. 따박따박 옳은 말하기를 좋아했던, 지금보다 몇 년 더 어린 그때의 나보다 지금 나는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5년 뒤에 지금의 나를 스스로 뿌듯해할 수 있게 5년 앞당겨 성숙해지는 것도 괜찮겠다. 내가 찐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를 찐 편하게 느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