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더 Dec 10. 2023

잘생긴 김치볶음밥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은 스키장에서 보냈다. 초등학생 때 두어 번 눈썰매를 타러 갔던 곳을 10년이 훌쩍 지나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 난생처음 가는 기분으로 갔다. 하필 스키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크리스마스이브라니. 그때 이후로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스키장의 대목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눈썰매장이 아닌 스키장에를 처음 발 디딘 거였으니 전혀 절대로 아예 도대체 알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전후가 스키장의 대목이라는 걸.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면 그 끝에 떡허니 서 있는 스낵이 내 근무처였다. 거기에서 우동도 말고, 어묵도 꽂고, 커피도 끓였다. 근무 첫날,  안 그래도 좁은 가게 안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가게의 통유리 창문 밖으로 펼쳐진 눈부신 너른 설원을 바라보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음미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은 그저 마음속 저 깊이 처박아둔 채 설거지를 하다가 주문을 받고, 주문을 받으면서 커피를 따르고, 커피를 따르자마자 우동을 말고 어묵을 건졌다.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올 새도 없이 주임이 냉동고에 미리 꽉꽉 쟁여둔 우동과 어묵을 남김없이 깨끗이 팔아 버렸다.


   정리와 마감을 하느라 종일 12시간 넘게 서 있다가 스키장 숙소에서 첫 밤을 보냈다. 웃풍이 심한 어두침침한 숙소에 놓인 철제 이층 침대에 누워 싸한 코를 가리느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니, 기다렸다는 듯 또그르르 눈물이 굴렀다. 고됨을 알고 몸은 그렇게 반응했는데, 의식은 곧장 곯아떨어졌다.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아마 꿈에서도 우동도 말고 어묵도 건지고 그랬을 것이다. 그날 오후에 접어들면서 일에 리듬이 생겨 나는 거의 장인 수준에 가깝게 로봇처럼 척척 일했으니 그 리듬이 아마도 뇌리에 각인되고도 남았을 거다.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의 해가 지고 드디어 그나마 여유로웠다. 그제야 패트롤들과 스키 강사들, 그리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보였다. 스낵 바로 앞 슬로프 하부에서 리프트에 올라타는 손님들을 케어하는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의 외모가 눈에 확 띄었다. 항상 비니를 썼는데 외까풀 눈을 가졌고 말수가 적은 게 완전히 내 스타일이었다. 키만 작지 않았어도. 다른 한 명은 두 말이 필요 없이 딱 거북이 같았다. 아무리 내 속으로 나 혼자서 하는 평가라도 다른 사람을 두고 그냥 거북이라고만 하기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멋진 이미지의 지칭, 닌자 거북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신정 대목도 도떼기시장처럼 부산스럽게 보내고 아르바이트생끼리 주점에 모였다. 와우! 남자들이 꽤 있었다! 음, 그런데, 스낵 바로 앞 슬로프에서 리프트를 맡고 있던 비니맨 외엔 다들 그저 그랬다. 오히려 스키 강사들이나 패트롤들과 노는 게 훨씬 신났었다. 화장실에 갈라치면 서너 개의 슬로프 곁을 지나 본관 건물까지 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강사나 패트롤이 타고 있는 스키에 내 두 발만 얹으면 그네들이 쉭쉭 지치는 스키를 타고 미끄러지 듯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틈이 나서 스낵에 들르는 그네들한테 언제든 커피를 대접해 주었고, 그러면 며칠 내로 무료 강습을 해 주겠다며 찾아왔다. 한 번은 자기네와는 친하게 안 지낸다며 인공눈 제조반이 스낵 출입문에다 눈을 잔뜩 쏴서 애를 먹기도 할 정도로 그네들과 친근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랑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 동기는 유쾌하고 건실해 보이는 스키 강사와 결국 커플이 되었고 휴무 타임마다 그에게 스키를 배우느라 온 슬로프에 두려움에 젖은 날카로운 비명을 뿌리며 아르바이트의 남은 기간을 보냈다.


   어라! 뭐지? 어느 날 아침, 스낵에 출근해 보니 출입문 앞에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물건이 놓여 있었다. 아주 차갑지 않은 걸 보니 두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열쇠로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비닐을 끌렀는데, 새빨간 플라스틱 통이 나왔다. 조심스레 뚜껑을 여니 밥이었다. 김치볶음밥. 먹음직스럽게 기름기가 촤르르 흐르는 김치볶음밥 위에 완두콩으로 하트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메모 한 장. 다시 비닐 안에 넣고는 제일 끝에 있는 슬로프의 스낵으로 뛰었다. 그 스낵엔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직원 언니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애기 엄마라서 왕언니라고 불렀다. 왕언니는 나를 포함한 스낵 아르바이트생 세 명과 마음이 잘 맞았고 스낵 운영에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하다 보니 우리 세 명은 무슨 일만 생기면 미주알고주알 왕언니한테 털어놓았다. 김치볶음밥과 메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메모에는 나를 향해, 웃는 모습이 이쁘다며, 밝은 모습이 보기 좋다며, 끼니를 대충 먹지 말고 든든하게 먹으라고 쓰여 있었다. 휴무라서 스키장 숙소가 아닌 집에 가서 자고 그날 아침 출근 직전에 볶은 거라며 맛있게 먹으라고. 보낸 이는 닌자 거북이었다. 허걱! 왕언니와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은 아직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고주파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나를 보고 좋겠다고, 부럽다고 했다. 닌자 거북인데? 정성이 어디냐며 이런 순정파가 어딨 냐고 했다. 닌자 거북이잖아! 잘해보라고도 했다. 닌자 거북이랑? 그렇게 넷이서 먹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게 김치볶음밥을 나눠먹으며 거북씨 덕분에 히히 락락거린 아침이었다.


   구정 때의 바쁜 일정이 지나고 학교 개강을 1주일쯤 앞둔 나는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끝냈다. 두꺼운 스키장 유니폼 잠바를 벗고 맨투맨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캠버스를 활보하던 봄, 그 어느 날 날아든 한 장의 메일. 닌자 거북이었다. 메일 주소는 어떻게 안 거야? 진지한 교제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본 후에 답을 달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고 보낸 메일과 받은 메일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거북이 외모는 정말 아니잖아.


   겨울만 되면 생각이 난다. 쿵푸 팬더에 나온 거북이 사부, 우구웨이 대사부처럼 세상 둘도 없는 인자한 웃음을 얼굴 한가득 머금고 있던 닌자 거북과 꾸준히 배달되어 온 김치볶음밥. 더 이상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 내가 된 건 스무한 살 겨울에 만난 그 열혈 순정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 둘도 없이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잘생긴 내 남편이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밥을 볶은 적이 없어서일지도.

작가의 이전글 서로가 편한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