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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Apr 19. 2024

궁색하지 않게

   아침 식사는 자취방을 나서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돌면 자리 잡고 있던 편의점에서 구입한 딸기 우유 한 팩이 전부였다. 대학교를 4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조기 졸업을 한 나의 아침 식사는 더 이상 기숙사 식당의 따끈따끈한 밥일 수 없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안은 매일매일 생활비를 계산하며 살아야 하는 긴장감을 접어둘 수 있었는데, 졸업을 하고 나니 기숙사 같이 금전을 덜 소비할 수 있었던 학교의 시스템들과도 작별이었다. 국립대학교의 4학년 2학기 등록금을 아끼려다가 궁핍함을 쪼개어 생활하는 바이오리듬을 되살리고 말았다.


   교원 임용 고시를 몇 개월 앞두고 있었기에 졸업을 한 후에도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학생증이 없이 중앙도서관을 출입하는 건 금지됐지만 단과 대학 도서관은 훨씬 자유로웠다.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을 파다 보면 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공부한 양은 얼마 되지 않는데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구내식당으로 향할 때 나는 홀로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미리 준비해 둔 김밥 재료를 꺼내 휘리릭 김밥 한 줄을 말아서 썰지 않은 채 일회용 비닐로 감싸 쥐고 베어 물면서 다시 방을 나섰다. 국 하나조차 끓이는 시간이 아까워서 궁리를 하다가 한 번 재료를 준비해 놓으면 뚝딱 챙겨 먹을 수 있으면서 그나마 영양가까지 있을 김밥을 매일의 점심 메뉴로 정했다. 내가 직접 마니 바깥에서 사 먹는 것보다 절반의 비용이 들었다. 재료를 한꺼번에 손질해서 냉장고에 두면 일주일은 끄떡없었다. 종일 유일한 군것질은 오후 시간에 졸릴 때 잠시 바람을 쐬며 마신 자판기에서 뽑은 믹스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프리미엄보다 100원이 싼 100원짜리 일반 커피. 저녁은 늘 구내식당의 1,100원짜리 백반이었다.


   이런 생활이 루틴이 되었다가도 간혹 변수가 생기곤 했는데, 이를테면 친한 선배가 밥을 사겠다거나 같이 공부하던 멤버들 중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하면 나의 소비 루틴과 시간 루틴을 고수하기가 어려웠다. 밥만 얻어먹고 날름 도서관으로 들어오기가 뭣 했고 자판기 커피일지언정 내 돈을 써야 했는데 그 몇 백 원에 가슴을 졸였다.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생기면 저녁 공부는 물 건너갔고 거금이 훅 빠져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졸업 후 약 4개월 간 시험 준비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상황이었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나가는 게 무서울 만큼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예 그런 자리를 피했다. 얻어먹지 않는 게 마음이 편했다.


   돈과 시간 둘 다를 아껴야 했기에 지금 되돌아봐도 그 몇 개월 동안은 그 선택과 그 루틴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후에 조금씩 조금씩 경제적,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음에도 나는 여전히 물건의 가격에 연연해하며 살았다. 소비 자체를 거의 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십 대, 이십 대 때와 달리 삼십 대 땐 월급이 들어오니 옷과 화장품도 사고 영화도 보고 그랬다. 그런데 내 취향껏 고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불편함이 일지 않는 비용선에서 선택을 했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면 편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좀 과하다 싶은 게 이미 구입한 것도 다른 매장에서 천 원이라도 저렴하게 판매하면 시간을 들여서 굳이 환불 처리를 받고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걸로 다시 구매했다. 그때의 남자 친구와 그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도 많이 했지만 이 매장의 물건을 반품하고 저 매장으로 이동해서 똑같은 물건을 구입하러도 많이 다녔다. 갈수록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열심히 사는 제자가 행여나 형편이 나아진 뒤에도 궁색한 마음으로 살까 봐 염려가 되었던지 고등학생 때의 은사님이 이십 대 중반을 넘고 있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황제 같은 대우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해. 거지와 같은 상황일 땐 그 상황을 직시할 줄도 알아야 하고."


   전문가 패널이 나와서 출연자에게 자녀 양육에 필요한 따끔한 조언을 해주고 방향도 제시해 주는 TV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그날은 자녀보다는 사사건건 억척스럽게 아끼는 엄마 출연자에게 방송의 초점이 맞춰졌다. 아끼는 것, 검소하다는 것은 미덕의 행실이다. 그러나 변기에 온 가족의 분뇨를 종일 모았다가 저녁에 한꺼번에 물을 내리는 건 과해 보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엄마 출연자가 스탠드 불빛이 아닌 핸드폰의 손전등 기능을 작동시키는 게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것도 과하다 싶었다. 전문가 패널은 엄마 출연자에게 극도로 아끼는 것이 그녀의 성격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불편해했을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하면서도 고치는 게 너무나 힘겨울 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엄마 출연자를 보면서 자칫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없을 땐 아끼고 안 쓰는 게 맞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더 중요한 것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없는 형편의 나에게 베풀려는 주변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김밥을 먹고살던 나에게 근사한 식당에서 파스타를 대접해 준 은사님께 파스타 한 그릇이면 김밥 몇 줄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여유가 생기면 여유로 인해 벌게 된 시간을 더 중요한 것에 사용해야 한다. 이미 구매한 물건을 몇 백 원 더 싸게 사기 위해 환불을 하고서 이 매장에서 저 매장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이게 어디 경제적인 여유에만 국한되는 얘기일까.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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