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위기, 그리고 나아갈 길
AI가 콘텐츠 노동 시장에 가져온 가장 큰 기회는 '반복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AI는 게임 애셋 제작, 영상의 후반 작업, 음원 믹싱, 웹툰 채색 등 막대한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던 작업을 자동화한다.
이는 창작자가 단순 '생산자(Producer)'의 역할에서 벗어나, AI가 생성한 수많은 결과물 중 최적의 안을 선택하고 조합하며,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총괄 기획자(General Planner)' 및 '큐레이터(Curator)'로 진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AI는 새로운 직무를 탄생시키고 있다. AI 기술을 영화 제작 프로세스 전반에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AI 필름메이커(AI Filmmaker)'나, AI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질문을 설계하는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와 같은 융합형 전문가들이 새로운 일자리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론의 이면에는 '일자리 소멸'이라는 냉엄한 위기가 자리한다. 2023년 할리우드 작가와 배우 노조가 벌인 대규모 파업은 AI 도입이 창작자의 고용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현실적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아직 생성형 AI 도입으로 인한 국내 고용의 뚜렷한 증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일자리(Job)'가 아닌 '과업(Task)'이 대체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한 직무를 구성하는 여러 과업 중 AI가 대체 가능한 부분이 늘어나면서, 기존 직무의 경계가 무너지고 역할이 재조정되고 있다.
이러한 '과업 대체'는 특정 분야의 인력 수요 감소로 직결될 수 있다.
게임: 중간 수준의 개발자 및 테스트 인력 수요 감소
방송·영상/영화: 번역, 자막, 데이터 정리 등 후반 작업 인력 감소
음악: 스튜디오 믹싱 엔지니어 역할 변화
애니메이션: 일부 전통 아티스트 및 그래픽 디자이너 수요 감소
이는 K-콘텐츠 생태계의 '유기체(Organisms)'인 창작자들 사이의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소수의 '기획자/큐레이터'와 AI에 의해 '과업'을 대체당하는 다수의 '생산자'로 분리될 위험이 있다. 이는 웹툰 산업이 겪는 상위 10% 작가가 수익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소득 격차 문제와 정확히 닮아 있다.
대전환기 노동의 미래는 기술이 아닌 '사람'에 대한 투자에 달려있다. 이는 생태계의 '토양(Soil)'을 비옥하게 만드는 일이다.
콘텐츠 사업체들이 AI 도입의 가장 큰 장애물로 '도입 비용(44.1%)'을, 향후 필요한 지원으로 '비용 지원(44.2%)'과 '인력 교육(25.2%)'을 꼽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첫째, 'AI 리터러시 교육'의 전면적 확대가 필요하다. 단순한 툴 사용법을 넘어, AI를 창의적으로 활용하고(기획/연출), 그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윤리/저작권),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경영/데이터) 융합형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둘째, 창작자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다. 웹툰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표준계약서, 분쟁 조정, 사회보장 제도가 필수적이듯, AI 시대에도 기술 변화의 충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창작자들이 최소한의 직업적 안정을 유지하며 새로운 기술을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AI가 생성한 정교한 콘텐츠는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어 생태계의 근간인 '신뢰'를 파괴한다. 생성형 AI 기술은 딥페이크, 불법 유해 콘텐츠, 디지털 성범죄, 보이스피싱 등 각종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AI 관련 사고 및 논란은 2014년 13건에서 2024년 233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AI 기술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높이는 주된 요인이다 (미국 40%, 영국 40%가 부정적 감정).
K-콘텐츠 생태계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이용자들은 콘텐츠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인도 시장의 낮은 콘텐츠 지불 의향 사례에서 보듯, 콘텐츠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이용자는 합법적인 유료 구독 대신 불법적이거나 무료인 채널로 이탈한다. 즉, '신뢰의 위기'는 곧 '수익의 위기'로 직결된다.
이러한 신뢰의 위기 속에서 'AI 생성물 표시제(Labeling)'가 전 세계적인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중 역시 AI 생성물에 대한 명확한 표시를 강력히 원하고 있다 (미국 77%, 영국 86%). 유럽연합(EU)은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Act'를 통해 AI 생성물 표시를 의무화했으며, 중국 역시 강력한 식별 표시 부착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2025년 1월 22일 시행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 제31조는 AI 사업자가 AI를 기반으로 운용된다는 사실을 고지하고, 생성형 AI로 만든 결과물임을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미 공직선거법은 선거운동에 딥페이크 사용을 엄격히 규제 및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표시제는 분명 '기회'다. 이용자를 보호하고, 허위 정보의 확산을 막아 사회적 혼란을 예방하며, 콘텐츠 생태계의 투명성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콘텐츠산업에 또 다른 '위기'를 안겨준다. 창의적인 콘텐츠 제작 활동이 위축될 수 있으며, 특히 이용자의 '몰입'을 생명으로 하는 K-콘텐츠에 치명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의 모든 컴퓨터그래픽(CG) 장면에 'AI 생성물'이라는 워터마크를 붙인다면, 시청자의 몰입감은 심각하게 저해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AI 기본법'은 이러한 딜레마를 인지하고 있다. 법 제31조 제3항은 "해당 결과물이 예술적·창의적 표현물에 해당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는 경우에는 전시 또는 향유 등을 저해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고지 또는 표시할 수 있다"고 명시하여, 콘텐츠산업의 특수성을 위한 예외의 문을 열어두었다.
'나아갈 길'은 이 예외 규정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첫째, '맥락에 따른 차등 적용'이 필요하다.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뉴스, 여론, 공공 정보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엄격한 표시를 의무화하되, '재미와 감동'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및 창작 콘텐츠(드라마, 영화, 웹툰, 음악 등)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예외 규정을 적극 적용해야 한다.
둘째, '유연한 표시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이용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비인지 워터마크(Invisible Watermark) 기술을 활용하거나, 콘텐츠 엔딩 크레딧 등에 관련 정보를 일괄 고지하는 방식을 통해 '이용자의 알 권리'와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AI Everywhere' 시대, K-콘텐츠를 둘러싼 '대전환'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콘텐츠산업이 직면한 세 가지 거대한 쟁점—창작의 주체, 노동의 미래, 그리고 신뢰의 위기—을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쟁점은 각각 법적, 경제적, 사회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며 K-콘텐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본질을 묻고, 쟁점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콘텐츠산업을 '생태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전략은 명료해진다. AI는 특정 '유기체'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 전반의 '토양'과 '대기'를 바꾸는 거대한 환경 변화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또한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정교한 설계여야 한다.
첫째, 생태계의 '토양(Soil)'을 비옥하게 해야 한다. AI 기술의 불확실성이라는 리스크를 줄이고 창작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AI 리터러시 교육, R&D 지원, 그리고 중소 창작자들을 위한 AI 도입 비용 및 인프라 지원이 시급하다.
둘째, 생태계의 '유기체(Organisms)'인 '사람', 즉 창작자를 보호해야 한다. AI를 동료이자 파트너로 활용하되, 그로 인한 이익이 소수 플랫폼이나 기술 기업에 독점되지 않고 창작자에게 공정하게 배분되는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표준계약서와 사회적 안전망은 그 핵심이 될 것이다.
셋째, 생태계의 '대기(Atmosphere)'를 정화해야 한다. 저작권과 공정이용에 대한 명확한 입법, 그리고 신뢰를 담보하는 유연한 생성물 표시제를 통해, 창작자들이 법적 불안 없이 창의성을 발휘하고 이용자들이 안심하고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는 투명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AI가 만든 콘텐츠'가 아니라, 'AI를 활용하여 더욱 강력해진 K-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결합하여 '재미와 감동'이라는 콘텐츠 본연의 임무를 증폭시키는 조력자로 복무할 때, K-콘텐츠는 '문화가 곧 경쟁력'이 되는 글로벌 소프트파워 강국이라는 비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것이다.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기술을 주도하며 'K-콘텐츠의 길'을 열어가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