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위기, 그리고 나아갈 길
한때 기술은 무대 뒤에서 효율을 높이는 조연이었다.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인공지능(AI) Everywhere’ 시대다. 특히 생성형 AI는 텍스트·이미지·음성·영상이 한데 얽히는 멀티모달로 진화하며 기획과 제작, 유통과 소비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새로운 문법이 되고 있다.
한국 콘텐츠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AI는 창작의 속도와 스케일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며 산업 구조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지 새로운 도구의 도입이 아니라, ‘어떻게 만들 것인가’와 ‘무엇을 즐길 것인가’를 동시에 바꾸는 패러다임의 이동이다.
이런 현상은 현장에서 더 또렷하다. 영상·게임·웹툰·음악에 이르기까지, 초안 작성·요약·번역·합성·보컬·TTS 등 세분화된 업무 모듈로 AI가 침투하며 콘텐츠 제작의 분업 지형을 다시 그린다. 이는 제작비와 시간을 낮추는 동시에, 맞춤형 경험과 몰입을 키우는 방향으로 수요 측면의 기대치까지 끌어올린다. AI는 곧 ‘작동하는 효율’이자 ‘보이는 품질’이다.
기술의 확장은 곧 논쟁의 확장이다. 콘텐츠 본질적 임무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이 임무에 충실히 복무하면서도, 콘텐츠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문은 다음의 세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AI는 창작자인가, 도구인가? AI는 동료인가, 대체자인가? AI는 진실인가, 거짓인가?
이글은 K-콘텐츠산업이 맞이한 AI 대전환의 국면을 창작(저작권/공정이용), 노동(직무 재정의/역량 전환), 신뢰(표시·검증·책임)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진단하고, 기회와 위기를 분석하여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생성형 AI는 이미 콘텐츠 창작 현장에서 단순 보조 도구를 넘어 '창·제작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5년 상반기 조사에 따르면, 국내 콘텐츠산업의 생성형 AI 활용률은 20.0%에 달하며, 불과 2년 전인 2023년 상반기의 7.8%에서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러한 활용은 특히 기술 친화적인 게임(41.7%) 및 방송·영상(30.8%)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콘텐츠 제작(63.0%) 단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AI가 K-콘텐츠의 창작 문법을 어떻게 재창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음악: AI는 작사, 작곡, 보컬 등 전 과정에 관여한다. 뮤지션 한나 다이아몬드(Hannah Diamond)는 ChatGPT를 "효율적인 브레인스토밍 도구"로 활용하며, 전설적인 프로듀서 팀버랜드(Timbaland)는 Suno와 같은 AI 작곡 툴을 '창작의 미래'라 칭한다.
보컬: AI는 인간의 감동을 복원하고 증폭시키는 데 기여한다. 비틀즈(The Beatles)는 AI 기술로 존 레논(John Lennon)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40여 년 만의 신곡 'Now and Then'을 발표했으며, 컨트리 가수 랜디 트레비스(Randy Travis)는 뇌졸중으로 잃었던 목소리를 AI로 되찾아 10년 만에 신곡을 발표했다. 이는 기술이 '재미와 감동'이라는 콘텐츠의 본질적 가치에 복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웹툰 및 영상: AI는 이미 웹툰 제작 현장에서 콘티 자동 생성이나 배경 채색에 활용되어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줄여주고 있다. EBS는 국내 방송사 최초로 생성형 AI로 제작한 'EBS AI 단편극장'을 방영했으며, 엔씨소프트(VARCO)나 크래프톤(CPC) 등은 게임 개발 전반에 AI를 도입해 혁신을 꾀하고 있다.
이처럼 빛나는 기회의 이면에는, '창작의 주체'를 둘러싼 심각한 법적 위기가 존재한다. 현행 저작권법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만을 보호 대상으로 한다.
첫 번째 딜레마는 'AI 생성물의 저작권'이다. 미국 저작권청(USCO)은 AI가 생성한 이미지는 저작권이 인정될 수 없지만, AI 생성물을 인간이 창의적으로 '선택, 배열, 조합'한 부분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AI는 도구일 뿐, 창작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인 'AI 학습 데이터의 공정이용(Fair Use)' 여부다. 생성형 AI가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기존 인간 창작물(텍스트, 이미지, 음악)을 학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저작자의 허락 없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 저작권 침해인지, 아니면 기술 발전을 위한 '공정이용'에 해당하는지가 세계적인 법적 쟁점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음반산업협회(RIAA)가 AI 음악 생성 도구인 Suno와 Udio를 상대로 대규모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법률 리서치 플랫폼 'Ross'가 경쟁사의 콘텐츠를 무단으로 AI 학습에 활용한 행위에 대해, 미국 법원은 '공정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는 AI의 결과물이 원저작물과 경쟁하는 '대체 시장'을 형성할 경우 공정이용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심지어 인간 예술가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조차, 원본 사진과 상업적 목적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변형적 이용(transformative use)'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물며 원본을 학습하여 유사한 결과물을 생성하는 AI가 이 기준을 통과하기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AI가 창작의 도구를 넘어 '저작권법의 회색지대'에 머무는 한, 이 불확실성은 K-콘텐츠 생태계 전체의 '토양(Soil)'을 위협하는 가장 큰 리스크로 남을 것이다.
이 쟁점의 해법은 AI와 인간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AI 협업(Human-AI Collaboration)' 모델을 명확히 정의하고 제도화하는 데 있다. AI는 강력한 도구이자 파트너이지만, 창작의 최종 주체와 저작권의 주체는 인간이어야 한다.
AI가 생성한 결과물 자체는 저작권이 없더라도, 그것을 유의미하게 선택하고, 배열하며, 창의적인 프롬프트를 통해 '연출'한 인간의 기여는 명백한 창작 활동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또한, AI 학습 데이터의 공정이용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입법이 시급하다. 원저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는 라이선스 모델을 구축하고, AI 학습이 원저작물의 시장을 직접적으로 대체하지 않도록 하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K-콘텐츠 생태계의 '대기(Atmosphere)'를 안정시키는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