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람 소리
새벽녘에 무거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어? 근데 내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네?
안방 문은 닫혀있고?
아마 내가 지난밤 안방에서 쫓겨나 소파를 덮쳤나 봅니다.
비몽사몽 머릿속을 헤집어 어제 무슨 일을 있었나 곱씹어 보려는데... 순간, 수치심이 밀려와 본능적으로 기억 회로를 차단해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운동복을 찾아 껴입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소리 안 나게.
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집 뒤 언덕길을 뛰는 둥 걷는 둥 올라갔다 오는 거, 늘 하던 루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만 가지 일이 다 귀찮고, 내키지 않을 땐, 차라리 늘어지게 한숨 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방 문은 아마 늦도록 열리지 않을 게 뻔하고, 괜한 신경전만 더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 무의미한 침묵 속에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느니, 내가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 싶어 집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 한데 미운 내가 잠시라도 사라져 주면, 아내가 그사이 마음이 설빙처럼 녹아 있다가, 평소처럼 해맑게 "왔어요?"하고 반겨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안방 문 앞으로 지나다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워봅니다.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밤새 안방 문을 닫고 있었다는 건? 뭔가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신호, 맞겠죠?
신발을 싣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도 들어 조심스레 현관 도어록 버튼을 사알짝 눌렀습니다.
근데 이놈의 벨 소리는 눈치도 없이, 늘 내던 높이로 '삐리릭' 소리를 내는 겁니다. 순간 내가 더 놀랬죠.
'이 망할 놈의 삐리릭!'
나는 문을 최대한 좁게 벌린 뒤, 그 틈새로 몸을 세워 잽싸게 빠져나갔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고, 아득히 빨려 내려갈 때는, 방광이 꽉 찼을 때처럼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휴~ 이래서 죄짓고 못 산다는 말을 하나 봅니다.
'근데,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지?'
이런저런 만 가지 생각을 업고, 마음을 조이며 언덕을 오르려니, 몸은 천근만근 내려앉고, 힘은 곱절 더 드는 데,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듯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와 평로(平路)를 삼백 미터 지나면, 곧바로 경사도 10% 가 넘는 굴곡진 비탈길을 1 킬로 넘게 올라가는 제법 깔딱 고개입니다.
그렇다 해도 아파트 입주 다음날부터 시작해서 10년 이상 해오던 루틴인데, 마음이 몸보다 더 무거웠던지 몇 걸음도 못 가 고개를 들곤 '아직도 여기야?'를 되풀이하면서 평소 나답지 않게 끙끙대며 올라갔습니다.
간밤에 장맛비가 많이 내렸나 봅니다.
저만치 앞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이 보였습니다.
아직 덜 자란 여린 연잎들이 빼곡하게 박혀있고, 소리를 들어보니, 맹꽁이, 청개구리, 비단개구리, 참개구리들이 다투어 제 양 볼을 부풀리는 시합을 한답시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개골, 꾸르륵, 맹꽁, 꾸르륵, 개골" 하며 울어댔습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노릇은, 연못 입구에 당도하자 요놈들이 일시에 '뚝' 울음을 그치는 게 아닙니까? 내가 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참 별일이다... '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개골, 꾸르륵, 맹꽁, 꾸르륵, 개골."
얼핏 아내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듯해서 몇 번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뭔가 아쉽다는 듯, 당신이 서운하다는 듯, 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듯한 목소리 같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아득하게 낙동강 물 위로 물안개가 걷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숨을 쉬는지 잔잔한 물결이 희끗희끗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불모산 어깨너머로 아침햇살이 떠밀려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서부터 낮게 깔려 내려오는 부드럽고 시원한 실바람이 제법 어른 손바닥만큼 자란 감잎을 흔드는 게 보였습니다.
마치 감잎이 "'야야야, 그러지 마." 하면, 실바람이 짓궂게 "왜에, 난 더 할 거야" 하는 듯했습니다.
가만히 다가서니, 감잎에는 빗방울이 여러 군데 맺혀있었습니다. 어떤 물방울은 감잎 끝에 대롱거리다가 실바람이 지나가면 홀짝 올라타서 날아가기도 하고, 실수로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잎 뒤에 숨어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는 앙증맞은 아기 감도 보였습니다.
경사진 언덕길이 끝나려면 아직 반도 못 왔기 때문에 계속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근데 발걸음이 훨씬 가볍고 빨라졌습니다. 마음은 어느새 집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거침없이 앞으로 가는데, 조금 전 감나무에서 만났던 실바람이 다시 불어와 나의 이마를 타고, 콧잔등을 스쳐, 양 볼을 간지럽히더니 귓전에 대고 뭔가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속삭였습니다. 실제로 조근거리는 소리가 실바람 등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무심결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조근거리는 소리는 아주 미세하고 얌전하고 포근하며 무엇보다 따뜻하고 느렸습니다. 그리고 결코 겹치지 않았습니다. 분명 소리는 두 종류인데 한 소리로 들렸죠. 한 소리가 끝나야 다른 소리가 이어서 들렸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뒤에 들리는 소리는 '추임새'였습니다. "응? 그래? 그랬어요? 저런." 하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앞소리에 끼어들거나 참견하거나 빈정대지 않았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공감하며, 그 소리가 더욱 풍족하도록 북돋아 주는 착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나는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서 좀 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저만치 앞에, 너무나 작고 여윈,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듯한, 그래서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 된, 그래야 실바람의 작은 위력에도 버틸 만큼 나약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두 손을 꼬옥 잡고 올라가시는 게 보였습니다.
입으신 옷이 흰색인지 회색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베로 만든 개량한복을 함께 입은 모습 뒤로, 결코 화려하지 않은 밝은 빛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망설였습니다. 점점 그분들과의 간격이 좁혀지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습 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감히 그분들을 앞질러 앞을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속도를 줄여 그 간격을 조금 더 벌리기로 했습니다. 혹 나의 예기치 못한 출현에 그분들이 놀라, 대화가 마음이 사랑이 깨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헥헥거리는 나의 숨소리가 오늘따라 거추장스럽게 미워졌습니다.
실바람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속삭이는 소리를 몰래 실어 날랐습니다.
" 요즘 들어 손목에 힘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애요, 설거지를 하다 그릇을 자꾸 놓쳐요..."
"그래? 저런, 그래 손은 안 다쳤남? 어디 좀 봅시다."
"아이고 참, 극성이셔요. 괜찮아요."
"그러니 내가 뭐랬소, 설거지하는 곳엔 얼씬도 마시라고..."
"아이고 괜찮아요, 그 정도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뒷집 순이랑 소꿉장난하며 했던 말을, 그분들은 지금 아무 거리낌도 없이 다정하게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의 하찮은 대화를, 영화 속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너무나 감미롭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어젯밤 아내가 나에게 무언가 소리를 하는 도중, 그것을 단칼에 끊는 나의 단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만해라, 지금 이 시점에 그 소리가 왜 나오는데?"
그분들의 소리에 고개는 더욱 숙여지고, 가슴은 떨리고, 걸음은 허우적거렸습니다.
'나는 왜 아내의 소리를 하찮은 소리라 생각했을까? 왜 그렇게 들었을까? 아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끼어들었을까?'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아기 천리향 숲으로 둘러쳐진 응달진 곳에 긴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의자 앞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먼저 할머니의 손을 잡아끌며 말씀하셨습니다.
"임자,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요."
"그래요, 영감님 힘드시죠?"
"난 괜찮소. 이까짓 거는, 임자가 힘드니까 그렇지."
"그래요. 저 힘들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그럼."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잡은 손의 다른 손으로 의자를 닦았습니다. 먼지보다 혹여나 벌레 같은 것이 있으면 큰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따라 실바람이 다른 날보다 체온이 미지근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일 년 동안 했을 일을, 지금 이 순간 다 쏟아부었으니까요. 그래도 전혀 투정하지 않고, 그분들의 어깨 위를 감싸고 있는 아기 천리향이 그분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쉬도록 가만히 내뿜는 감미로운 향기를 몰래 가져와 내 코끝을 자극하는 일까지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넌 뭐 하니 빨리 돌아가지 않고?" 하는듯했습니다.
나는 여기쯤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두 분의 행복한 대화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실바람이 전하는 말의 온도가 채 식기 전에 집에 당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입니다.
오늘 루틴은 여기서 중단.' 삼십보 정도를 걷다가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혹 나의 인기척에 그분들이 놀랄까 봐 신경이 써였습니다.
등 뒤에서 수많은 연잎들이, 개구리들이, 감잎과 아기 감이, 실바람이 모두 커다란 밤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 듯했습니다.
"아저씨~ 벌써 가요? 얘기 좀 더 하다 가세요~"
"개구리야 실바람아 미안해, 난 지금 너희들과 있을 시간이 없구나. 내일 다시 올게."
"어 씨, 안되는데..."
뒤이어 두 분의 애달프고 잔잔한 미소가 내 뒷머리를 쓰다듬는 듯 따스함이 느껴졌습니다.
"젊은이, 예들은 걱정 마요, 내가 종일 동무가 되어줄게, 어서 집에나 가봐요."
실바람도 내 등을 떠미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