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1편)

첫사랑

by 용가리사내

누구나 한 번쯤 풋사랑의 늪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처음이거나 자아가 불안하게 여물어가는 질풍노도의 학생 시절이라면 그 감정은 더욱 간절하고 애달팠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 등굣길은, 집을 나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어귀를 지나 굴곡진 해안선이 사자발처럼 내밀고 있는 산 허리를 가로지른 신작로를 30분 이상 걷고 나면 가파른 언덕이 버티고 있었다. 그 언덕 비탈에는 갈지자로 좁은 길이 있었는데, 길의 중간쯤에는 벽은 하얗고 지붕은 노란 단층 슬래브집이 있었다. 그 집을 뒤로 돌아 계속 올라가면 언덕의 2/3 지점쯤에서야 비로소 2차선 아스발트길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는 학교 근처까지 버스를 탈 수 있었으니, 고행은 그제야 끝이 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등굣길. 나는 해안선을 끼고 선 산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슬래브 집 불과 두어 미터쯤에 이르렀을 때 철재 대문이 열리며 단정한 교복차림의 여자아이가 조심스레 문턱을 넘어 나왔다. 여자아이는 집 뒤로 향해야 했고, 나는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했다. 좁은 길 위에서 병목이 생겼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어색한 시선이 스쳤다. 아주 짧은 시간 긴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다 말고 먼저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듯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죄를 지은 듯 고개를 떨군 채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그 아이의 뒤를 따랐다.


언덕을 올라서니 버스가 서 있었다. 그 아이가 먼저 올라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 안내양이 나를 보고 손짓을 해댔다. 서둘러 타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르는 척 딴짓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안내양이 급히 문 안으로 몸을 숨기는 순간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출발했다.


다음 버스는 무려 30분 뒤에나 오는 데...

망했다. 지각이다.


멀어져 가는 버스 뒤창에 그 아이의 얼굴이 잔영처럼 비쳤다.

"바보, 이 바보야!" 하고 비웃는 듯 보였다.


나는 황급히 그 아이의 시선을 피해 언덕 아래 슬래브 지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면부지 여자아이에게 느끼는 이 황당한 감정은 뭘까 그리고 버스는 왜 타지 않았을까.


버스 한 대를 그냥 보낸 대가는 단순히 지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도부의 호된 얼차려와 교실 앞 복도에서 한참 동안 벌을 서야 했다. 벌을 받는 내내 그 여자아이의 입가에 띤 엷은 미소가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 등굣길을 허둥댔다.

저만치 그 아이 집이 보이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하더니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라고 수없이 다짐해도 소용없었다. '먼저 보내고 따라갈까, 내가 먼저 지나갈까?'

어떤 날은 대문 몇 걸음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부리나케 지나쳤던 거 같다.

마주치기를 바라는 속마음과 반대로 마주칠 눈길이 두려워 조바심이 나고 불안했다.


또 어떤 날은 그 아이가 앞서 가거나 내 뒤에서 따라올 때면 발걸음이 황망스럽게 허우적거려 도저히 그 아이를 따라잡을 수 없거나 앞으로 달아나질 못했다.


내가 먼저 언덕을 올라 버스를 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뒤이어 그 아이가 버스에 올랐다. 얼마나 설레고 복잡한 심경이었는지 몰랐다. 비로소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황홀했다.

그 아이가 머물다 사람들 어깨에 밀려났을 때 향긋한 오이비누 냄새가 났던 거 같다. 정신이 혼미하고 괜스레 두려웠다.

점차 버스 안은 사람들로 빼곡히 찼. 가녀린 그 아이는 정류장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 틈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고 걱정이 됐다.


아침밥도 거르고 일찍 집을 나섰던 때도 있었다. 언덕을 잽싸게 올랐다. 버스를 그냥 보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언덕 아래를 수만 번도 더 살폈던 거 같다.


"나보다 먼저 버스를 타고 갔구나..."


괜스레 허망하고 너무 화가 났다.

그날은, 앞에 앉은 덩치가 작은 반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 생각 없이 걸려든 아이를 작살을 냈다.


아침마다 실속 없는 이 일을 반복하면서

1년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