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의 노인이 지하철 노약자 좌석에 앉아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주말이라 노약자 좌석 주변까지 외국인 관광객들이 떠밀려와 북적거렸다.
노인은 자신 앞에 서 있는 너덧 명의 외국인 여성들을 한참 동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중 목소리가 크고 쾌활한 한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다짜고짜 자신의 나이가 78세라고 밝혔다. 중국인 여성은 노인의 나이가 78세라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 엄지를 치켜세웠다. 노인의 외모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노인은 고무된 듯 한 번 더 "세븐 에잇" 하고 외쳤다. 노인은 자신의 나이를 "세븐티 에잇"이라고 표현하지 못해 "세븐 에잇"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영어로 78은 몰랐지만 다행히 7과 8은 알고 있었다. 여성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주자, 노인의 행동은 더 과감해졌다.
"헤이, 유, 핸드폰?"
여성은 동료들의 표정을 살폈다.
동료들은 동시에 여성이 손에 쥔 핸드폰을 가리켰다.
여성은 노인이 '너의 핸드폰이냐?'라고 묻는 줄 알고 "예스, 마이 핸드폰."이라고 대답하고 웃어 보였다.
그러자 노인은 한 손을 들어 여성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오케이, 핸드폰 남바, 핸드폰 남바."라고 외쳤다.
여성은 자신의 핸드폰을 가슴에 안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료들도 목을 쭉 빼며 두 손을 들어 '나도 잘 모르겠어.'라는 몸짓을 했다.
여성은 노인이 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의 옆자리에 앉은 다른 노인들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도움을 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노인들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는 듯 앞만 바라보았다. 마치 돌부처나 다름없었다.
노인은 좌우의 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이 핸드폰 남바, 공일공에 이이일이에 일이삼사."
중국인 여성은 잘 못 알아듣고 고개를 노인 쪽으로 내밀며 "에 애?"하고 되물었다.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내 핸드폰 번호는 공 일 공에 투 투 원 투에 일 이 삼 사!"라고 소리쳤다.
고함소리는 노약자 좌석을 넘어 젊은이들이 앉은 자리까지 퍼졌다. 몇몇 젊은이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손으로 입 주위를 감싸며
"공, 일, 공에 둘, 둘, 일, 이에 일, 이, 삼, 사아."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중국인 여성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어 노인의 입 가까이 갖다 댔다.
노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 번 친 후, 다시 검지를 세워 또박또박 숫자를 하나씩 그려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인 여성은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함을 용서하라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성은 마치 자신의 핸드폰 화면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을 듯 몸을 깊이 숙이고,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성은 핸드폰 화면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을 살폈다.
노인도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OK' 신호를 보냈다.
여성과 다른 중국인 여성들도 밝게 웃으며 화답했다.
"이번 역은 부산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열차 내 방송이 내릴 역을 알리고 있었다.
중국인 여성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캐리어를 챙기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성들의 동작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열차의 문이 열렸다.
우루루 출입구 쪽으로 몰려가던 중국인 여성들 중 한 여성이 당돌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이 바이!"
그러자 한 노인이 힘없이 손을 들어 보이며 들릴 듯 말 듯 "바이 바이..."라고 했다.
열차 문이 닫히는 순간,
노인은 반쯤 일어나 막 시야에서 사라진 그 여성을 향해, 한쪽 손을 귀에 갖다 대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열차 문은 그대로 닫혔다.
노인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의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다른 노인들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처음부터 지켜보던 한 청년이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노인은 처음 열차를 탔을 때 처럼, 앙상한 어깨죽지 사이로 깊이 고개를 파묻고 입맛을 다셨다.
열차는 종착역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내릴 역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