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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Jan 29. 2020

피노키오와 J교수

2014~2015년에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피노키오>에는 "피노키오 증후군"이라는 가상의 병이 나온다. 피노키오 증후군을 선천적으로 가진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설정은 영화 <라이어 라이어>(1997), <정직한 후보>(2020), 일드 <사토라레>(2001)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피노키오>의 흥미로운 점은 피노키오인 최인하(박신혜 분)가 기자가 되면서, 거짓이 판치는 언론계에서 양심과 진실을 지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드라마 전반부의 악역은 최인하의 어머니인 송차옥(진경 분) 기자다. 송차옥은 과거 악의적 보도로 남주인공인 최달포(이종석 분)의 가정을 파멸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기자가 된 최달포는 송차옥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달포를 사랑하는 인하는 달포와 어머니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러한 가운데 복수를 꿈꾸는 달포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송차옥의 오보 때문에 회사가 파산했다고 주장하는 버스회사 사장이 나타나 피해를 호소한다. 버스회사 사장의 말을 보도하면 송차옥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달포와 인하는 버스회사 사장이 증거를 조작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달포는 인하에게 진실을 모른 척할 것을 종용한다.


달포: 너만 입 다물면 돼. 그럼 너네 어머니가 오보 낸 거 되는 거고, 기자 더 이상 못하게 될 거야. 너네 어머니 거짓말로 내 가족이 다 박살 났는데 그깟 거짓말 좀 하면 어때. 그게 옳은데! 그게 맞는데!
인하: 알았어. 우리 엄마가 틀린 걸로 하자.(딸꾹)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할게.(딸꾹)

 SBS 드라마 <피노키오> 13화 중에서


더 큰 악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작은 거짓말은 불가피하지 않을까? 하지만 달포는 끝내 인하의 딸꾹질을 모른 척하지 못한다. 버스회사 사장의 거짓말을 밝히고, 원수와도 같던 송차옥을 본의 아니게 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거짓말을 못하는 인하의 딸꾹질이 달포를 잘못된 길에서 구해낸 감동적 장면이다.


살면서 달포와 같은 유혹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것 하나만 눈감고 넘어가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이것 하나만 눈감고 넘어가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는데...

이것 하나만 눈감고 넘어가면 더 큰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데...


하지만 그런 말로 자신을 설득하려 해도 어디선가 양심이 내는 딸꾹질 소리가 들린다면 우리는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피노키오 증후군은 현실에는 없다. 사적인 관계에서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공적인 문제에 관한 거짓말을 보면 아쉽다. 하지만 우리가 듣고자 한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딸꾹질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J교수의 경우를 보자.


J는 사립대학 교수다. 어느 날 그가 지지하는 진보정권에서 J의 30년 지기인 교수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그런데 법무부 장관의 부인이자 J와 같은 대학 동료인 교수가 딸을 위해 대학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의혹이 불거진다. 학교에서 사실을 조사하던 J는 표창장이 위조되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나였다면 비겁하지만 침묵을 선택했을 것이다. 침묵을 선택한다면 사립대학 교수라는 안정된 직위를 지킬 수 있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지식인으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지기를 배신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갈 수 있다. 지지해온 '진보'의 정의를 바로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J는 그러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대학 교수를 그만두었다. 그동안 몸담았던 정당 역시 탈당했다. 표창장이 위조됐다고 밝혔다. 30년 지기와 옛 동료들을 비판했다. "진보적 지식인"의 간판을 내리자,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J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았는가에 대해서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J는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으리라고. 그리고 이내 어디선가 들리는 딸꾹질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고.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사람이 그 딸꾹질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P.S. 하지만 드라마 <피노키오>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피노키오가 믿는 주관적 "진실"이 객관적으로도 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가 진실이라고 믿은 피노키오의 말 때문에 주인공의 가족은 파국을 맞이했다. 나는 진중권의 신념과 용기를 지지하지만, 그의 사실판단에 대해서는 유보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물론 해당 대학 교수,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판단이 일정한 근거에 기반해 있으리라 추측은 하지만, "내가 아니까요"라는 말만으로 그 사실판단에 동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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