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너머, 낯선 풍경 #47

칫솔을 사는 하루

by Gnoy

2017/09/07(목) | 런던 4일 차


버거운 아침, 또 다시 휴식

여행이라고 해서 매일이 반짝이는 건 아니었다. 어떤 아침은 눈을 뜨는 일조차 번거롭다. 며칠째 이어진 낯선 공기와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빅벤의 종소리도, 대영박물관의 묵직한 전시도, 어제까지는 선명했는데 오늘은 배경처럼 희미했다.

거창한 의미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오전 내내 벙커 침대에 등을 붙인 채 천장을 바라보며 안락한 여유를 즐겼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가 울었다. 그리고 끝이 벌어진 칫솔이 떠올랐다. 여행자도 결국 이를 닦고, 씻고, 끼니를 챙겨야 하는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London5day_016.jpg 침대에서 뒹굴며 보던 네셔널지오그래픽 다큐!

1.59파운드의 현실

카메라 가방은 열지 않았다. 오늘은 풍경을 수집하는 대신, 일상을 보충하는 날이었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1.59파운드짜리 칫솔과 0.99파운드짜리 비누를 집어 들었다. 소소한 소비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낯선 도시에서도 나를 유지해주는 작은 도구들.

점심은 근처 가게에서 3.5파운드짜리 페리페리 버거 세트로 간단히 해결했다. 특별하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에 씨티은행 ATM에서 100파운드를 인출했다. 기계음과 함께 나온 지폐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여행은 결국 설렘과 계산 사이를 오가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의 나는 설렘보다 계산에 조금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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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마실 나가는 중

10파운드의 무위(無爲)

해가 기울 무렵, 다시 잠깐 밖으로 나갔다. 저녁이라기보다 밤을 채울 준비에 가까웠다. 기네스 맥주 네 캔과 윙 8조각, 콜라 하나, 도넛 하나. 도합 10파운드짜리 봉지를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동네는 한산했고, 내 하루도 느리게 흘렀다.

캔을 따고 한 모금 삼키자 쾡했던 기분이 풀렸다. 윙을 뜯고, 도넛으로 입을 달래며 오늘의 지출을 휴대폰 메모장 속 일지에 기록했다. 오이스터 카드 충전 10파운드까지 더해진 숫자들이 휴대폰 속에 정렬되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같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맥주 기운이 천천히 번지자 졸음이 밀려왔다. 내일은 또 내일의 속도로 흘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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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안 풍경

오늘의 질문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지출은 일어난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여행지에서 아니 관광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정말 낭비일까,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솔직한 태도일까?


비용 정리

오이스터 카드 충전: 10.00 파운드

칫솔 1.59 + 비누 0.99: 2.60 파운드

점심(페리페리 버거 세트): 3.50 파운드

저녁(기네스 4캔 5.45 + 윙 8조각 1.70 + 콜라 1.70 + 도넛 1.00): 10.00 파운드

하루 지출 합계: 26.10 파운드
(현금 인출 100파운드 별도)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