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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 Apr 19. 2016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그대..

내 어린 영웅들과 함께쓰는 행복한 교실 이야기3.

지난주 금요일 아이들이 모둠별 토론 수업에 열중해있을 때 교실을 한 바퀴 빙 돌아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던 장면이 있었다.


녀석들은 구멍이 나고, 찢어지고 낡은 누군가 실내화 옆에 나란히 자기의 실내화를 벗어놓고 싶지 않았었던  알았다.

무용실로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오는 짧은 순간 아이들은 그 누군가에게서 자연스럽게 한뼘씩 거리를 두고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구나..


실내화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채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넓은 자리를 두고도 굳이 좁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서로 따닥따닥 붙어앉은 아이들 틈에서 늘 표가 나게 조금씩은 떨어져 앉아있고 뒤쪽으로 한 걸음씩 물러나 있던 형오(예명).벌써부터  덥다고 반팔을 꺼내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는 4월인데 형오는 3월 개학부터 매일 입고 오던 짙은 감색 운동복을 아직도 입고 다닌다.


지난 수업에서 형오네 모둠에선 '봄' 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상황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했었다. 모둠원 중 한 친구가 겪었던 일이었다. 작년에 가족들과 여의도 벚꽃축제에 갔다가 많은 인파 속에서 그만 다섯살 난 어린 동생을 잃어버려서 온 가족이 그 동생을 찾느라고 고생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과장되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갑자기 달려 나오며 등장한 형오는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 한마디 없이 교실 안을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했다. 엄마, 아빠, 이모, 동생, 형의 역할을 맡은 친구들은 신나게 벚꽃축제장에 도착해서 맛있는 간식도 먹고 즐겁게 사진도 찍는데 열중했다. 그러다가 막둥이 동생이 한눈을 팔고 어디론가 가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선 애 하나 제대로 건사 못 했다며 엄마랑 아빠는 서로 원망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온 가족이 정신없이 막둥이를 찾아다니는 북새통을 펼치는데 그 광경이 어찌나 보는 친구들에겐 재미있던지 극을 보던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오는 두꺼운 운동복을 입은 채로 나중엔 땀까지 뻘뻘 흘리며 혼자서 열심히 달리기만 했고 언제쯤이면 한마디라도 대사를 할지가 점점 궁굼해졌다. 하지만 다른 모둠 친구들은 다행히 막둥이를 찾아서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듯한 감격을 나누며 기뻐했고 극은 거기에서 그대로 끝이 나 버렸다. 그리고 형오의 알 수 없었던 뜀박질도 그제서야 멈출 수 있었다.


사실 관객들은 커다랗게 동그란 원형으로 앉아있었고 배우들은 그 원안에서 공연을 하는데 형오는 원밖을 돌며 뛰고 있어서 극의 흐름에 열중한 관객들은 형오가 계속 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쩌면 형오는 그렇게 친구들의 시선에서조차 그만큼 떨어져 나와 있었는지도 몰랐다.


형오네 모둠이 큰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신이나서 뒷풀이겸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을때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물어봤다.


" 얘들아, 그런데 형오는 왜 대사가 없었어? 형오는 무슨 역할이었니?"


약간 당황스러운듯 모둠원중 한 아이가 대답을 했다.


" 그게요, 형오가 할 역할이 없어서 그냥 택시기사 역할을 하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어쩌면 일부러 그랬을까? 굳이 꼭 함께 가지 않아도 될 이모 역할까지 만들었으면서 그깟 아이역할 하나 더는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건가?


"얘들아, 극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만 등장을 한다고 했잖아. 대사가 있든없든 꼭 극에 필요한 사람만 무대에 등장할 수 있고 그래서 너희들이 지구라는 큰 무대에 등장한 이유도 너희들 한명 한명이 반드시 세상에 필요해서 온 거라고, 그러니 너희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 잊지말라고..그런데,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형오가 모둠에서 맡을 역할이 없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들은 이내 조용해졌고 누군가 나서서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때 형오가 손을 들더니 이야기를 했다.


"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여의도 벚꽃축제를 하면 그 안으로 차가 못 다니니까 아이들이 택시를 못 탄거 아닐까요?"


구세주라도 만난 느낌처럼 모둠 친구들이 일제히 형오의 대답을 거들었다.


" 맞아요, 그래서 저희도 지하철을 타고 갔었어요."


" 그랬구나..하지만 형오가 택시 기사님 역할이었으니 보는 관객들도 형오가 택시기사님 역할이란걸 알게 했어야지. 예를들면 가족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오늘은 복잡해서 여의도쪽은 택시로 가기 힘들다고 하거나, 택시를 타고 가다가 너무 막혀서 결국 중간에 내려서 걸어갈 수도 있잖아."


아이들은 그제서야 마치 풀리지 않았던 숙제의 실마리를 얻은 듯이 여기저기서 '그렇구나' '그렇게 할걸' 하며 다시 하면 안되냐고 아쉬워하는 표현을 했다.


그래, 아이들은 형오의 역할에 대해서, 형오의 모둠 기여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형오는 역할을 맡은 것만으로 불평하지 않았고 그대로 만족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형오야 멋진 택시기사님 역할을 맡았는데 왜 가운데 무대에서 운전을 하지 않고 무대 밖에서만 운전을 한 거야?"


" 아! 그건요..여의도 벚꽃축제를 할 때는 교통순경 아저씨가 자동차를 그 안쪽 길로는 못 다니게 돼서요."

순간 가슴이 멍먹해져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얘들아, 오늘 너희들이 각자 연기한 역할들 중에 형오만큼 완벽하고 설득력있게 자기가 맡은 역할을 분석한 사람있니?오늘 형오는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는 역할이었지만 묵묵히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느라 혼자서 극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달렸어."


" 선생님 눈에는 형오밖에 보이지 않았어. 형오야, 너무 감동했고 멋지고 훌륭했다."


그제서야 쑥스러워 하는 형오에게 친구들이 조금씩 몸을 기울이고 다가앉으며 칭찬의 말을 전해주었다.


" 형오야, 진짜 잘했어."


형오네 반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됐는데 도저히 내 안에서 아픈 감정들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친한 동생, 동료 선생님께 형오 이야길 하면서 뭔지 모르게 내 안의 설움을 이참에 풀어낼 핑곗거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으로 그냥 눈물이 났다. 그래서 왠지 어떻게든 위로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형오의 선생님인데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형오의 환경이 너무 아팠다.


" 어떻게 형오는..이제 겨우 5학년 아이일뿐인데 그렇게 속이 깊고 예쁠 수 있을까?"


엄마가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다는 형오. 그래도 늘 해맑게 웃고 건강한 포동포동 이쁜 . 형오에게 새 실내화를 하나 사주고 싶은데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혹시라도 낡은 실내화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민망해하거나 친구들에게서 괜한 시선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형오의 칭찬거리를 찾아 두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묶어서 상으로 주면 어떨까 하다가 그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나의 더 솔직한 고백을 하기로 했다.

퇴근후 마트에 들러 실내화를 고르는데 왠지 설레기까지 하면서 요즘엔 실내화도 참 예쁘고 재질이며 디자인도 다양하고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웃으며 형오를 불러서 내 옆에 세웠다. 그리고 고백을 했다.


"얘들아, 오늘 선생님은 너희들한테 정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려고 해. 그래서 용기가 좀 필요했어. 하지만 너희들한테 고백을 해야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선생님은 어제 형오의 실내화를 봤어. 그리고 형오에게 너무 부끄러웠어. 선생님 같았으면 아마 찢어지고 낡은 실내화를 신기 싫다고 엄마한테 짜증을 내고 울었을 거야."


"선생님이 얼마 전에 옷장 정리를 했어. 그동안 사놓고 한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나 아직 쓸만한 멀쩡한 물건들을 그냥 버렸어. 솔직히 버리면서 조금은 아깝기도 했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계속 쌓아놓기만 하느니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형오의 낡은 실내화를 보면서 너무 부끄럽고 많이 반성했어. 형오는 어제 선생님에게 정말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었어. 선생님이 너희만 할 땐 몽당연필도 다 볼펜 깍지에 끼워서 쓰라고 하셨고 물도 전기도 모든걸 아끼고 절약해야 한다고 배웠어. 그래서 그 가르침을 잊고 있었던 선생님한테 선생님이 되어준 형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새 실내화를 선물하고 싶었어. 이건 언제든 형오가 신고 싶어질 때 그때 가서 신어줬으면 너무 기쁘고 좋겠어."


집에서는 먹지도 않고 굴러다닐 사탕 쪼가리 하나라도 선생님에게 받을 때는 뭐 대단한 거라도 받는 것처럼 좋아하며 꼭 두 손으로 받는 귀여운 아이들이다. 그런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형오는 다행히 감사하다고 선물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아직도 비닐에 싸인 실내화를 품에 안고 다가왔다.


" 저...선생님, 선물요, 진짜진짜 너무 감사합니다."

" 형오야, 선생님 마음을 받아줘서 내가 더 진짜진짜 너무 감사해."


그리고 오늘..


언뜻 보기에도 제일 하얗고 빛나는 형오의 실내화는 친구들의 실내화랑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국어수업 "놀부전" 모둠을 정할 땐 메소드 폭풍 연기를 펼치던 명배우 형오를 너도나도 케스팅 일 순위로 영입하기 위해 작은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느 팀으로 가야 할지 속 깊고 착한 형오는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도와주고 싶지 않은 행복한 고민남이었다.


"사랑하는 내 주님, 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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