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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미 Oct 13. 2022

1. 구로 급행에서 울다

H마트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나에게는 독일고모가 있다. 아빠의 막내 누나이자 여섯 남매의 셋째인 독일고모는 파독 간호사로 일하다가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여 독일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녀는 독일고모였고 한국에 올 때마다 나에게 하리보 젤리와 독일산 립밤을 선물했다. 


고모가 왜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지, 왜 내 옆에 남아 매일같이 서툴어진 한국어로 나를 사랑해줄 수는 없는 건지 어린 시절의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모의 남편과 딸이 독일에 있다는 것도, 혼혈인 고종사촌 언니들의 외모가 아주 외국인 같다는 것도 내게는 그저 받아들이기 어색한 문장에 불과했다.




고모는 아빠와 아주 많이 닮았다. 웃을 때 반달로 접히는 눈 모양, 살짝 길쭉하게 발달한 턱,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마른 몸매와 말할 때 퍼지는 콧볼. 그리고 거울 속의 나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것들도 비슷했다. 고모는 가난했던 고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한국으로 선물을 보냈다. 비타민, 초콜릿, 사탕, 화장품. 그리고 볼펜들. 


내가 어릴 때, 고모는 한국에 도착하면 가방에서 엄청난 양의 볼펜을 꺼내 조카들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독특한 색감과 모양의 펜들에서는 보통 검은색과 파란색 잉크가 나왔다. 휘향 찬란한 외면을 보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무지개색이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던 나는 조금 실망하고는 했지만, 그래도 종류별로 한 자루씩 챙겨서 학교에 가면 자랑을 했다. 독일에서 온 고모가 줬어. 우리 고모는 부자야. 돌이켜보면 그때 고모는 부자가 아니었는데, 내 눈에는 부자 그 이상이었다. 고모는 '우리'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 했다.


아빠는 가난하던 시절에도 조카들의 생일에는 학교로 전보를 보냈다. 예쁘게 꾸민 카드에 시구를 적어 생일 편지를 보냈는데, 사촌오빠들은 그게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아빠는 그런 이벤트를 준비했었는데 전보 시스템이 일반인 사이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 된 2010년대의 일이라 아빠의 편지는 교실이 아닌 행정실에 도착했다. 


행정실 직원은 나에게 "앞으로 이런 건 학교 말고 집으로 받으렴."이라고 말했다. 저 아저씨는 낭만을 모르나 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안해서 조금 부끄러웠다. 아빠한테 행정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아빠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받는 게 묘미인데, 그 사람 낭만이 없네.


고모는 아빠의 낭만을 응원하는 지지자였다. 아빠와 같은 모양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에 형제들을 태우고 험난한 시절을 건너온 고모. 그런 고모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빠는 누가 뒤에서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제 4년 만에 독일고모를 만났다. 어떤 기간에는 매년, 어떤 기간에는 한 해 걸러 한국을 방문하던 고모는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큰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코로나를 견디는 동안 고모는 만질 수 없는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영영 떠난 이들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과 늙은 시절을 그리며 울었겠지. 고모와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들이켰다. 


고모는 '떠나다'라는 동사를 자주 썼다. 암으로 친구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가 배호의 음악을 틀자 이 사람 떠났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네가 결혼하고 나면, 아이를 낳고 나면, 나도 떠날까? 나는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독일로 떠나요? 고모는 어머, 하고 웃었다. 


고모는 젊은 시절에 10년 동안 한국에 오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아이를 키워야 했고, 많은 것이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미자와 문주란의 노래를 들으며 울고, 낭만 빼면 시체인 우리 아빠가 적어 보낸 편지를 보며 울었다. 


고모를 만나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그 지난한 시절을 상상하며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미셸 자우너가 한인 마트인 H마트에서 장을 보며 엄마를 향한 추억과 그리움을 쓴 글을 비롯하여 엄마와 한국에 대한 에세이가 담겨있는 책인데, 마치 누가 점지해주기라도 한 것 마냥 어제 낮에 ebook을 다운받아 두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H마트에서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 이중에 누가 올해 또는 지난 10년 동안 고향에 못 갔을까? 누가 나처럼 죽을 때까지 영영 못 볼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H마트에서 울다」中

나의 40년 뒤를 빼닮았을 고모의 얼굴이 겹쳐졌다. 독일어를 못하면서 독일에 살았던 여자. 한국이 그리워 말린 대추를 넣어 수정과를 끓여 마셨던 여자. 보이스톡과 페이스북이 없던 시절에 짧은 국제 전화로 사랑을 말하던 여자. 우리는 할아버지 제사가 있을 때마다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집전화 앞에서 한 명씩 이름과 근황을 말했다. 


당시 고모는 한국어가 지금보다 서툴러서 더듬더듬 우리의 목소리와 말투로 우리가 누군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가늠했다. 가끔은 외국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추임새를 넣고, 가끔은 할머니 같은 말씨로 대답하면서. 한낮의 오후에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며 타국에서 아버지를 추모했어야 할 고모를 생각하면 사실 조금 눈물이 난다. 누가 뒤에서 바람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나는 구로 급행에서 울었다. H마트도 없는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언니와 동생의 아내들이 보내준 김을 굽는 고모의 작은 어깨를 떠올리면서. '떠나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붉어지던 눈시울과 독일식으로 발음하는 영어 단어들을 떠올리면서. 고모를 영영 그리워할, 고모의 딸들 보다도 고모를 닮은 내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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