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슬픈 드라마를 볼 준비가 되었다면
#16 <미안하다, 사랑한다>
미사 폐인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지독하게 슬픈 드라마를 볼 준비가 되었다면)
이 2004년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연달아서 두 번이나) 다시 보게 된 데에는 지락실3 영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장담하는데, 나 말고도 지락실 때문에 이 드라마를 다시 꺼내본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내 주변 곳곳에서도 미사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은근히 들었고, 언뜻 보니 드라마큐브 같은 케이블 채널에서 미사를 다시 방송해주기도 하는 것 같더랬다. (작년에 웨이브에서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의 효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에 발생한 이 작은 열풍은 아마도 이은지의 공이다! 지락실에서는 아부다비 한복판에서 이은지의 기가막힌 드라마 요약과 연기(!)로 영업된 멤버들이 다같이 미사를 보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미사 열풍이 돌았던 듯했다. 그리고 이 부분의 클립이 숏츠로 생산되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의 드라마들은 누가 갑자기 그 드라마 속 캐릭터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해도, 그 드라마의 OST를 조금 들려주기만 해도 향수가 왈칵 몰려온다. 2004년 그때, 초등학생 시절 뭘 알았겠냐만 날 포함해 내 주위에서도 임수정 무지개 니트를 너도나도 따라 입었고, 난 맨날 빵모자를 (ㅎ..) 쓰고 다녔으며, 거리에 들리는 박효신의 '눈의 꽃'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여운에 잠기게 만들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내가 이 드라마를 제대로 다시 본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는 드라마 속에 잔뜩 포진되어 있는 착한 캐릭터들, 착한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추운 겨울날 은채가 노숙자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던 장면이 충격적이었는지 아직까지 기억속에 각인되었을 정도다.) 이 드라마의 장르가 멜로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것도 심지어 이경희 작가님이 왜 대한민국 멜로의 대가라고 불리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사랑에 사정없이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멜로. 한 장면 한 장면 감정이 휘몰아치고 마음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너무나도 대단한 대본이었다. 사실 지락실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를 시작한 다른 큰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요즘 직면하고 있는 내 과제 (슬픈 장면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때문이었다. 슬픈 드라마를 생각했을 때 바로 생각나는 드라마라서 다시 시작했는데 1차로는 눈물콧물 흘리며 감상만 했고 2차가 되어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부여잡고 분석을 하고 있다. 내가 멜로를 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장르와는 상관없이 작가님이 만드신 캐릭터 및 장면 구성과 대사 하나하나에 눈빛이 반짝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들여다보면서 실력의 벽을 여실히 느끼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낙담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을 좀 더 성실히 분석해야겠다고 강하게 느낀 것이었다.
요즘 옛날 드라마들이 눈에 밟힌다. 요즘 시대엔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빽빽하게 몰아치는 드라마만 만들어야 한다고? 옛날 드라마들을 복습하면서 그게 요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사실, 이전부터 드라마의 초반부는 이미 엄청나게 몰아치고 있었다. 물론 요즘의 속도감과 다르긴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몰아침이 분명 있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다시 보니 그랬다. 드라마는 2화까지 (반전을 제외하고) 중요한 설정들을 거의 다 깔아놓고 시작한다. 사랑받는 드라마들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필수적인데 이 드라마는 유독 그렇다. 보자마자 마음이 가고 실제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가득했다. 특히 두 주인공들은 드라마 속 대사를 인용하자면 '가슴에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었어서 애정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고 말이다.
일단 주요 캐릭터들은 다음과 같다. (이 내용도 전부 초반 2화안에 다 드러난다.) 호주 멜버른의 거리를 나다니며 강도 짓을 하고 누군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차무혁은 한국에서 호주로 입양된 남자로, 입양된 가정에서조차 버림받았다. 무혁은 자신과 7년간 사귀었지만 돈 많은 마피아 보스와의 결혼을 선택한 지영 대신 머리에 총을 맞고 시한부가 된다. 한편 스타 가수 최윤의 스타일리스트인 송은채는 최윤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그를 짝사랑하지만, 그가 다른 여자에 목매는 것을 도와주고 지켜봐야 한다. 최윤은 스타 가수지만 사랑 앞에서 순수하고 맑은 남자고, 최윤이 짝사랑하는 강민주는 마찬가지로 스타지만 사랑을 믿지 않고 게임처럼 여기는 여자다. 이밖에도 윤이의 엄마이자 무혁의 친엄마인 오들희, 무혁의 쌍둥이 누나 서경과 조카 갈치, 은채네 가족, 의문의 노랑 할아버지까지 빠르게 등장한다. (사실 드라마를 끝까지 보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무혁, 은채, 오들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들희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단순히 주인공의 친엄마 포지션이 아니다. 내가 무혁이라도 된 것처럼 오들희의 얼굴만 봐도 그녀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갈망이 생길 정도였다.)
캐릭터 소개와 함께 2화 안에 전개되는 내용도 빼곡하다. 무혁이 오랜 연인 지영에게 배신당한 것은 물론이고 시한부가 되어 한국에 가는 내용, 무혁이 호주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은채를 팔아넘겼다가 결국 탈출시키는 내용, 민주를 짝사랑하는 윤이가 바람둥이 민주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시작하는 내용, 한국에 온 무혁이 자신과 함께 버려졌던 이란성 쌍둥이 누나가 있고 그 누나가 어린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정신연령이 낮아졌다는 걸 알게 되는 내용, 무혁의 친엄마가 한국의 유명했던 배우였으며 최윤의 엄마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목격하는 내용, 한국에서 무혁과 은채가 우연히 다시 만나는 내용까지 전부 들어가 있다. (지나고 보면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드라마는 이 2개의 회차만으로 각 캐릭터들을 전부 강렬하게 보여주면서도, 흥미롭고 흔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담아낸다. 다음 회차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전개인 것이다. 이 엄청난 전개 속에서 대사도 뻔하지 않고 캐릭터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도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이 뻔하지 않은 엄청난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놀랐던 건 연출까지도 굉장히 정성스러웠다는 점이었다. 특히 중간중간 스틸이 잡히는 부분이 있는데, 화보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마치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고 있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져서 엄청난 쾌감이 느껴졌다. 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내기 위한 조명과 카메라 구도에서도 많이 놀랐다. 무혁이 오들희의 집 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액자 속 윤의 위치로 들어오는 연출이라든지, 후반부에 무혁과 윤이의 비밀이 밝혀진 이후 윤이에게만 밝게 빛이 비춰지는 조명이라든지, 다양한 구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샷을 찍는 촬영 기법이라든지 굉장히 많은 지점들이 있었다. 중간중간 마이크가 보이는 실수가 있기도 했으나 이 당시에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더 촉박하고 혼란했으니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 환경 속에서 예술적으로 분투한 스태프들의 의지와 능력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차무혁의 헤어밴드, 송은채의 무지개 니트와 어그부츠가 센세이셔널 했던 건, 의상, 헤어, 소품, 로케, 연출, 음악까지 정성스럽게 공들인 덕분일테다.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웰메이드였다. 무혁의 테마송들과 '눈의 꽃'은 특히나 마음을 미어지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이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대본이었고 말이다. (드라마를 다 보고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배우, 감독, 작가를 포함해 각 분야의 모든 스태프들의 열정이 오롯이 느껴져서 내 가슴이 다 뛰었다. 내가 처음으로 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마음 먹었던 순간이 다시 생각나기도 했다. 무혁 캐릭터에게서 느껴진 열정은 그들에게서 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드라마에는 유독 각 인물들 개인의 충동적인 행동이나 격정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부분들도 참 인상이 깊었다. 윤이가 거품목욕을 하면서 그 안으로 은채를 풍덩 끌어들이는 장면이나, 무혁이 지영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강에 돈을 뿌려버리는 장면, 무혁과 은채가 같이 손을 잡고 도망친 후 땅바닥에 누워 같이 마주보고 자는 장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며 민주가 갑자기 바다에 빠져버리는 장면, 윤이가 민주의 열애설을 듣고 촬영장에 가서 차 경적을 이마로 꾹 누르고 있는 장면, 무혁이 애국가를 고함지르듯 불러대는 장면, 은채가 무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외치는 장면 등이 그랬다. 이런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묘하게도 시청자로서 해당 작품에 갖고 있던 그 어떤 벽이 확 무너지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의외성에 매력을 크게 느끼는 건 그게 작품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삶의 그 어떤 순간이 되었든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심지어 그 의외성이 캐릭터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더더욱.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1화부터 시청자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의 강렬한 힘이 있었던 드라마였던 게 분명하다. 다시 보니 참 대단해서 가슴이 벅찼다. (아아아.. 난 한국 드라마가 너무나도 좋다!!!)
다시 드라마의 전개로 돌아와보자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2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즉 무혁이 자신의 엄마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이제 앞으로 나머지 14개의 회차를 어떻게 끌어갈까? 나는 감도 오지 않았다. 기가 막힌 설정들을 꽁꽁 숨겨놓고 하나씩 풀면서 회차를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설정들을 다 깔아놓고 캐릭터들의 감정과 관계성에 집중해서 나머지를 끌어가는 것이다. 이걸 잘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대본의 힘이라는 걸 요즘 깨닫고 있는 중이다. 시청자들이 빠져들 수 있도록 각 인물의 마음을 보여주고, 해당 장면이 실제로 세상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고 몰입할 수 있도록 감정을 흔들어줄 장면과 대사와 함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대본의 정수라고 느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거의 모든 회차를 마음 찢어질 듯 슬퍼하며 본 드라마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다. 당시 '미사 폐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와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게 몰입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미어지게 만드는 드라마는 흔치 않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지독하게 슬프고 비극적인 드라마였다. 여러 번 보고 나니,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모든 인물들의 가슴에는 멜로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깊어서 사무치는 사랑, 그리고 어쩔 때는 파국을 불러올 만큼의 뒤틀린 사랑. 무혁과 은채, 무혁과 오들희, 윤과 오들희, 무혁과 서경, 서경과 오들희, 갈치와 서경, 무혁과 서경, 무혁과 갈치, 은채와 윤, 은채와 민주, 대천과 오들희, 무혁과 지영, 노랑 할아버지와 그의 여동생 등.. 모든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멜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연인으로, 가족으로, 우정으로, 짝사랑으로, 결핍으로 표현되었다. 가장 마음을 후벼팠던 건 주인공 무혁을 둘러싼 멜로였지만 말이다. 비극적 결말이 정해졌지만 영원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무혁과 은채,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의 사랑에 간절했던 무혁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차무혁에게, 그를 연기한 소지섭 배우에게 미쳐있었을까? 그리고 무혁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돌팅이 송은채를, 그녀를 연기한 임수정 배우를 사랑했을까?
거칠고 날라리같은 외모에 그렇지 못한 성격. 차무혁은 너무 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깊은 심성을 갖고 있는 청년이었다. 오랜 연인에게 배신당했음에도 그 사람을 위해 총 앞에 뛰어들 수 있었고, 자신을 버리고도 다른 아들을 애지중지해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엄마도 끊임없이 사랑하며 보고싶어하는 사람. 이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송은채는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그 남자의 짝사랑을 도와주고,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겉옷을 내어줄 수 있는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생명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미쳐버릴 정도로 순하고 착한 사람. 은채도 세상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가슴아픈 사랑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물론 힘든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애틋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말하면 안심이 될까.
각 잡고 슬퍼지는 게 괜찮다면, 오히려 그렇게 울고싶은 시기라면, 이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단, 다시 '미사 폐인'이 되면 나처럼 그들의 인터뷰를 계속해서 찾아보고 2004년에 머물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꼭 명심해야 할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