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모래시계>

전국민을 일찍 귀가시켰던 95년 전설의 드라마

by 큐레이터한

#19 <모래시계>

전국민을 일찍 귀가시켰던 95년 전설의 드라마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던져진 세 남녀의 강렬한 이야기)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던져진 세 남녀의 강렬한 이야기)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던져진 세 남녀의 강렬한

1995년 당시 전국민이 방송 시간에 맞춰 일찍 귀가했다는 전설의 드라마가 있었으니, 그 드라마의 제목은 바로 <모래시계>. <모래시계>는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했을 정도로 90년대 레전드 드라마 중 하나였다.


한참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정주행 무한 루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는 <발리에서 생긴 일>을 거쳐 이제는 <모래시계>를 보고 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우리 가족들은 2025년 요즘, 소파에 모여앉아 <모래시계>를 2-3회씩 본다. (옛날 드라마만 좋아하는걸로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우린 <사마귀>, <폭군의 셰프> 같은 지금 방송중인 드라마도 시청한다. 우리 가족은 원래가 드라마를 좋아한다.) 부모님은 1995년 당시 엄청났던 <모래시계>의 인기를 설명해주시고, 나는 김종학 감독님과 송지나 작가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청한다. 그게 너무 재밌어서, 저녁에 <모래시계>를 보는 게 요즘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을 정도다.




© 드라마 <모래시계>


지락실의 여파인지, 요즘 옛날 드라마를 다시 보는 나같은 시청자들이 꽤나 있는 듯하다. 옛날 드라마들은 화질도 좋지 않고 요즘 드라마에 비해 흐름도 다소 길게 느껴지는데도, 묘하게 끌린다. 우리가 그 시절의 드라마를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투박하면서도 정성이 가득 담겨있는 게 매력적이기도 한데, 그 이상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드라마들이 지금 시청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경험했던 혹은 우리가 경험해보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분명히 있다. 해당 드라마를 보던, 지금보다 덜 고단하고 덜 각박했던 그때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유명한 <모래시계>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휩쓸었던 작품 앞에서는 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완벽한 컨디션에서 봐야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드디어 보게 된 <모래시계>는 그야말로 현대사를 관통하는 엄청난 저널리즘 드라마였다. 뿐만 아니라 최민수X고현정X박상원, 그리고 이정재. 이렇게 네 명의 배우들의 존재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내던져진 청춘들의 강렬한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각 캐릭터에 몰입되어 열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연들도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이 나왔는데, 배우들의 연기력과 화면 장악력이 굉장했다.)




© 드라마 <모래시계>


<모래시계>의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박태수. 최민수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로,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바로 이 명대사의 주인공이다. 학창 시절부터 주먹을 잘 썼던 태수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당시 전교 1등이었던 우석에게 도움을 청해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꿈꾸던 육사 진학이 불투명해지고 어머니마저 생을 떠나자 모든 것을 포기하며 조직폭력배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인물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정치깡패 활동도 하게 되고, 결국 암흑세계의 거물이 된다. 조직폭력배가 주인공인 드라마라니..! 몰입이 가능할까 싶지만, 박태수가 하는 행동들에는 자신만의 신조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의리가 있어 사람들이 따르고, 나름 불의를 참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초반부에 태수가 도저히 주인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지만) 박태수가 가는 길에는 온갖 현대사의 사건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태수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시민군이 되어 죽을 뻔하기도 하고, 심지어 삼청교육대까지 끌려나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참 충격적인 전개였는데, 격동의 시대였던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휘말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모든 사건들에는 태수-혜린-우석 간의 관계망도 엄청 얽혀있다. 태수와 우석은 서로 다른 방향을 걷지만 너무나 깊고 오래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친구 사이고, 태수와 혜린은 약혼을 했지만 혜린의 아버지로 인해 떨어뜨려진 상황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맞물려 전개된다. 현대사의 실제 사건들(특히 광주 민주화운동)을 묘사한 드라마가 <모래시계>가 처음이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 드라마에 환장했는지 납득이 되었다. 심지어 실제 깡패들조차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모래시계> 방송 시간대에는 활동하지 않았다는 썰이 있던데, 참 여러모로 기록적인 드라마였던 것 같다.




© 드라마 <모래시계>


고현정 배우가 연기한 혜린이란 캐릭터는 매력적인 설정은 다 갖고 있는 캐릭터였다. 드라마 초반부에서 보여지는 혜린은 불의를 참지 않고, 학생운동의 선두에 서는 열혈 대학생이었다. 당차고 똑똑한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다가, 이내 혜린의 과거 서사가 전개되는데, 이때 반전이 시작된다. 알고보니 윤혜린은 대한민국 카지노 대부 윤재용 회장의 딸이자 후계자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부자였던 데다가, 암흑 세계를 군림하고 있는 윤재용 회장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왔던 것. 하지만 이런 배경을 싫어했던 혜린은 홀로 밖으로 나와 대학 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들이 우석과 태수다. 혜린은 같은 학교 학생이자 옆방에서 자취하는 우석과 우정을 나누다가 우석의 친구인 태수를 만나게 된다. 세 사람은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고 친구가 되지만, 세 사람 모두 다른 방향의 길을 걸으며 온갖 갈등 상황에 내던져지게 된다.


사실 난 언젠가 우연히 씨네21에서 고현정 배우와 이미연 배우의 인터뷰를 읽고 두 사람의 팬이 되었었다. 그래서 고현정 배우의 드라마들을 보고 책을 읽고, 현재는 유튜브 채널도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이상하게도 <모래시계>는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제야 본 <모래시계>에서 고현정 배우가 연기한 혜린은 반짝반짝 빛나는 캐릭터였다. '창피한 게 너무 많다'고 말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모습도, 도피했다가 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받은 끝에 결국 친구들을 배신하고 나서 폐인이 되는 모습도,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모습도 참 입체적인 캐릭터로 비춰졌다. 태수, 우석, 재희와 각기 다른 케미스트리를 보이는 것도 인상깊었던 부분.




© 드라마 <모래시계>


다음 주인공은 우석이라는 인물로, 참 곧고 곧은 캐릭터다. 줄곧 전교 1등을 해오다 법대에 진학한 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검사가 된다. 우석도 만만치 않게 혼란했던 시국에서 온갖 사건들과 휘말려야 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검사라는 목표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최대한 시끄러운 일이나 불의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우석의 캐릭터가 가장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 장면은 대학생 때 장면이었다. 대학생들이 거의 다 학생운동에 참여해서 텅텅 비어있던 강의실, 그 안에서 올곧은 자세로 시험을 보고 있는 우석의 장면이 참 신선하고 기억에 남았다. 우석이 어떤 캐릭터인지 한번에 설명되지 않는가!


하지만 우석은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겠으나 온갖 사건 소용돌이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가령, 태수가 폭력배들에게 쫓기자 태수를 구하려다가 2차 사법시험을 놓치게 된다든지, 시험 낙방후 입대했는데 광주에 내려가 진압군이 되어야 했다든지, 삼청교육대에 잡혀들어간 태수를 빼내기 위해 뒷돈을 찔러주는 부정의 행위를 결심한다든지 등의 일들 말이다. 그러나 가만 보면 태수가 자신의 신념을 눈감는 순간들에는 친구 태수라는 요인이 있어왔다. 암흑 세계의 거물이 된 친구와 검사가 된 친구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이 드라마의 큰 관전 포인트다.




© 드라마 <모래시계>


이 드라마로 스타가 되었다는 이정재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 백재희도 빠뜨릴 수 없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사람들이 이정재 배우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만한 요소들이 많았다. 일단 설정부터가 혜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켜주는 보디가드다. 그리고 대사 몇 없이 과묵한 캐릭터인데, 키가 크고 옷 태가 좋아서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이 갈 만해 보였다. 심지어 재희는 혜린이 어렸을 때 납치된 혜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조직을 배신하기까지 했던 인물로, 드라마 시작부터 끝까지 혜린을 짝사랑한다. 이런 순애보 캐릭터를 시청자들이 놓칠리가 없다. 역시 시대가 언제든 상관없이 과묵한 짝사랑 순애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나보다.




© 드라마 <모래시계>


이렇듯, 해당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전부 입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참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들을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이들에게 갈등이 수도 없이 밀려오는 게 안쓰럽기도 했고 말이다.


<모래시계>는 캐릭터 말고도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현대사가 정성스럽게 묘사되었다는 점이었다. YH사건, 서울의 봄, 광주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의 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이어지는데, 눈에 띄었던 점은 그 당시의 실제 영상들과 드라마 영상들을 교차해서 같이 내보낸 장면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실제 영상을 드라마 속 뉴스 화면이나 신문 사진으로 활용하는 건 봤어도 중간에 넣은 건 처음 봤다. 예를 들어,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과 드라마 촬영 영상이 여러 번 교차되며 드라마가 전개됐다. (심지어 전두환의 실제 취임 영상까지 그대로 내보냈다.) 고발 다큐와 드라마의 중간을 걷는 드라마 같았다. 그래서 해당 회차들을 보는 내내 그 참혹함과 무력감에 마음이 참 무겁고 슬펐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현대사를 관통하는 캐릭터들이었다. 우정을 나눈 이들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어서 그 비극을 더 심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 드라마 <모래시계>


성공한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듣자마자 드라마 속으로 바로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대표 OST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가 성공해서 그 음악이 귀에 익게 되어 몰입이 쉬워진건지, 아니면 반대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음악 덕분에 드라마 몰입이 쉬워진건지 그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를 빛나게 해주는 데 음악의 역할이 크다는 점은 사실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눈의 꽃'이 있다면, <모래시계>에는 러시아곡 '백학'이 있었다. 듣기만 해도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우우우 우우-' 이 곡 말이다. 이 곡이 없는 <모래시계>는 상상이 안 된다. 너무 대단..


최경식 음악 감독님과 더불어, 김종학 감독님, 송지나 작가님, 그리고 열연한 수많은 배우들의 잘 들어맞는 합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드라마 <모래시계>. 이 드라마를 본 건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좋은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특히 작가님들의 저력을 느끼며 나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며 의지를 다잡게 된다. 정말 너무나 좋은 공부가 된다.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를 최대한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이제 다음으로 보게 될 드라마는 무엇일지 잔뜩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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