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큰 벽걸이티비를 설치했다.
작은 패드로 보다가 큰 화면이 생기니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 영화들을 계속해서 봤다.
전화가 와서 "뭐해?" 라고 물으면 "드라마 봐."
카톡이 "뭐해?" 하고 오면 "드라마 봐."
내 대답은 한동안 계속해서 "드라마 봐." 이고 아마 앞으로도 "드라마 봐." 일 것 같다.
티비는 거거익선이라더니... 작은 집이라 55인치 TV를 두었는데 그냥 벽에 꽉차게 더 큰 걸 살 껄...
나와 같은 업에 종사하는 업계 선배이자 친구가 티비가 생기니 공부를 많이 한다고 카톡이 왔다.
학창시절엔 드라마보면 공부 안한다고 우리 집 TV전원이 뽑혀있었던 것 같은데, 드라마를 보는 게 공부라니 정말 세상 좋은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 일을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나니 드라마에 옛날처럼 몰입이 되진 않는다.
더욱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보고 있으면 1시간짜리를 2시간에 걸쳐서 보곤 한다.
익숙하지 않은 컷을 보면 "와, 이건 어떻게 찍은걸까?" 하면서 10초 뒤로 돌려서 컷을 분석해보고 연결이 튀는 부분이 눈에 띠면 낄낄거리며 본인들의 경험담을 늘어놓고.
익숙한 장소는 어? 여기 엄청 비싼데. 새로운 장소는 어? 여기 괜찮은데 어딜까?
큰 씬이 나오면 와... 제작비 엄청 들었겠네... 얼마 들었을까?
조명 진짜 이쁘게 잘 쳤네. 조명팀 어디지? 앵글을 기가 막히게 잡았네. 촬영감독님 누구시지? 등등...
궁금한 게 어찌나 많은지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분석을 하게 된다.
뭐 얼마나 전문가라고 내가 분석을 하는 게 정답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드라마를 보는 것 만으로도 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니 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
새로 나온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사무실에서 대화의 흐름에 끼어들기 어려우니 맨날 드러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어도 난 공부하는 중이라는 핑계도 댈 수 있다.
내 직업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를 저 카톡 하나로 다시금 느껴서 또 한 번의 전직 욕구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