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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룡 Jun 21. 2024

기꺼이 악역이 된다는 것

실패했습니다.

처음 나에게 후배 제작PD가 생겼을 때부터 선배들은 말했다. 

"사람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해."


나는 지금껏 딱 한명을 제외하고(이번 작품에 들어서야...!) 나보다 어린 후배PD를 만나지 못했다. 

적게는 한 살, 많게는 다섯 살까지 많은 인생 선배이기도 한 후배 PD들에게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할 뿐이다. 물론, 모자란 나의 인격 덕분에 함께 일하는 당시에는 미안함보다 분노와 화, 괘씸함과 자격지심이 많다.



대학을 조금 늦게 졸업하고 26살에 이 일을 시작했다. 일을 특별히 일찍 시작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일에 뛰어들고 1년, 2년 지나다보니 졸업하자마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 게, 특히 제작부라는 직무에서는 빨리 일을 시작한 편에 속했다. 그러다보니 연차가 쌓이는 것과는 별개로 당연히 항상 나이로는 팀에서 막내였다. 항상 후배든 선배든 간에 (유교사상이 뼛속깊이 박혀있던)나에겐 모두가 인생선배였기에 무언가를 배워야한다는 생각이었고, 나이가 많은 자에겐 무조건적으로 YES를 해야지만 예의바른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업무에 있어서는 대차게 혼나야지만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고 그걸 깨달았을 때 후배PD들이 일을 못한다는 게,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호되게 일을 배운 편에 속했다. 쌍욕을 들으면서 일을 배웠고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선배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후배가 일을 잘못했을 때 혼을 내지 않는 게 방법은 아니었더라. 나는 내가 대신 일을 처리해주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연장자를 혼낼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럼 알아서 눈치껏 다음부터는 제대로 해올 줄 알았는데 그 다음에 또 오답을 가져오면 화가 났다. 답답했다. 날 무시하나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혼을 낼 용기는 또 없었기에 또 내가 정답을 만들어서 줬다. 그럼 또 그 다음에 오답을. 그럼 내가 정답을. 그럼 또 오답을. 그러다 결국 화를 내는 것도, 혼을 내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차가운 말이 나가게 됐다. 그렇게 조금씩 관계에 분열이 생겼다. 


이번 작품은 끝날 때쯤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들은 일이 늘지 않을까. 핑계를 대자면 이번엔 정말로 내가 유난히 바쁘고 예민했다.

그래서, 

첫째로는 그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 일을 했던 것 같다.

두번째로는 그들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른다. 왜냐면 내가 그냥 해버렸으니까. 

세번째로는 후배들이 연장자라는 이유로 나도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네번째로는 위에 나열된 모든 이유를 가진 상사는 카리스마가 없다. 

결론적으로 내 리더십의 부재였다. 


나는 후배들에게 욕먹기 싫은 그냥 그런 PD였다. 애초에 호되게 가르쳤더라면 나도 편하고 그들도 일이 늘었을텐데.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다음작품에서 나에게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 당근과 채찍을 잘 써야 한다는 것, 사람을 잘 다룰 줄 알아야한다는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화와 분노보다는 미안함이 들었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100만큼 성장할수 있었던 이들이 50만 얻어나가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후배PD님들에게 더더욱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어느 순간에는 기꺼이 악역이 되어야한다는 걸 배운 것 같다. 막판이 되어서야 다음 작품에서 이들이 1인분을 해낼 수 있게끔 해보려 했는데 그게 잘 먹혔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다음작품에서 나에게 도움의 연락이 오면 기꺼이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나에게 연락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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