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대로 살든,거꾸로 살든

by 소리글

우리가 겪는 불행의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고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

어떤 일도 기꺼이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목에 가시가 되어 삼킬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보는데 “중년이란 12살 때보다 조금 더 어려울 뿐이더라고.”라는 대사가 나왔다. 늙어도 여전히 스윗하고 잘생긴 에단호크의 손을 꼭 잡고 말해주고 싶었다.


“오빠, 인간적으로 그건 아니더라.”


나의 중년은 12살 때보다 육만 배쯤 더 힘들게 시작됐다. 다치고, 수술하고, 산정특례를 받던 일들도 버거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봉은 코로나의 공습이었다. 2019년 말, 전 세계가 더듬거리며 코로나라는 글자를 처음 배웠다. 해외여행을 취소하던 날만 해도 내년에 가면 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적을 알아야 싸울 수 있는데, 우리는 코로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상태로 몇 년을 일방적으로 당했다. 아니, 얻어터졌다. 희망 따윈 바닥에 버려진 채 갈기갈기 찢겼다. 우린 매일 콧구멍만 찔러댔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코로나시국은 거대한 사고현장이었다. 인재였다.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온 나라가 거대한 사고현장이었다. 그 아래에 깔린 개인의 일상은 완전히 뭉개졌다. 집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서로의 눈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코로나가 의심되면 입학식, 졸업식도 못 갔고, 온 가족이 각자의 방에 격리됐다. 나는 식판에 밥을 배식했다. 아이들은 노트북화면으로 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코로나에 절대 걸리면 안 되는 존재였다. 나는 온 집안을 씩씩하게 조종하는 총지휘관이었다. 그런데 그때가 한창 몸이 아픈 시기였다. 밤이면 등이 아파 울면서 잠을 청했다.


2020년, 3월, 대구 수성구에 슈퍼전파자가 나타났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뉴스에서는 그 환자의 동선을 따라잡느라 난리였다. 프라이버시는 누구네 강아지 이름이었다. 그 날은 마침, 시어머니가 서울로 요양병원을 옮기는 날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대구에서 온 시어머니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시어머니는 몇 년간 서울시의 보건정책에 의해 종합병원 진료 날 외에는 외출할 수 없었고, 우리도 병실에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매주 주말이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면회실에서 시어머니를 만났다.


시어머니는 파킨슨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파킨슨과는 완전 다른 병이다. 몸을 떠는 게 아니라, 서서히 굳어가는 병인데, 예후가 몹시 좋지 않은 희귀병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둘 다 희귀병을 앓는 셈이었다. 사실 나는 시어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정도였다. 시어머니의 병은 여러 증상들을 동반했는데 초기에는 무엇보다 치매 증상을 동반한 성격변화가 컸다. 새벽이고 아침이고 내게 전화를 해, 병원을 나가겠다고 떼를 썼다.


“나 택시 불러다오. 내려가야겠다.”

“어무이, 택시비 없잖아요. 돈 있어요? 없죠? 좀만 계셔요. 제가 주말에 갈게요.”


이런 어르고 달래기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어졌다. 왜 매일 나만 찾는지 모르겠으나 시어머니는 내 말을 그래도 잘 듣는 편이었다. 나중이 되자 난 눈을 감고 졸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냥 귀여운 아기가 투정 부린다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예, 예, 저 곧 갑니데이~.”


당시 나는 제작사와 한참 회의를 하고 대본을 쓰던 기간이었다. 간병사들은 수시로 내게 전화를 해 시어머니가 기저귀를 뜯고,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소연을 하고 그만뒀다. 나는 계속 다른 간병사를 구해야 했다. 손으로는 노트북을 두드리며 어깨에 폰을 끼고 간병업체와 통화를 했다. 결국 시어머니는 그 병원 전체의 블랙리스트가 됐다. 더 이상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병이 나쁜 것이지, 시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기에 지쳐갔다.

세상에서 젤 어려운 일 중 하나가 간병사 기분맞춰드리기다. 일은 힘든 거 알고있지만 내 승질 다 죽이고 정말 잘해드렸다.

대본 읽다가 눈이 나빠지고, 밤새 마감에 허덕이며 손가락이 글을 쓰는지, 머리가 글을 쓰는지도 모르다가 아침을 맞이했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남의 것 뺏어먹는 게 흔한 이 험한 드라마 판에서, 한없이 착하게 일하면서 여기저기 치이는 동생들과 밤새 드라마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허무하게 결국 모든 걸 접고 나서도 저 많은 작법서들과 대본을 치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먼지만 닦아댔다. 한 손으로는 간병사를 구하면서 말이다.


코로나 시국이 아무리 암울해도 삶이 늘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재미는 발품을 팔면 다 나왔다. 슬퍼도 친구와 같이 울면 결국 웃음이 터졌다.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했다. 그래서 살은 쪘지만, 먹는 재미도 없으면 왜 사나 싶었다. 강직성 척추염 진단을 받고 주사제를 맞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던 우물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던 통증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었다. 기복은 있었지만, 발목이 덜 아픈 것만 해도 살 것 같았다.


시어머니와 대학병원으로 외출하는 날이면 남편과 휠체어를 싣고 내리고 땀을 흘리면서 전우애도 키워갔다. 점점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이 자꾸 잘 안 눌러진다며 가르쳐달라는 시어머니와도 머리를 맞대고 깔깔 웃는 여유가 생겼다. 대학병원 카페에 파는 라떼를 마시고 싶다며 조르면 그걸 호호 식혀서 쥐어드리고 돌아오는 하루가 힘들지만 보람도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도 우리 며느리라며 자랑하는 시어머니가 간병사 문제로 애먹여도 밉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늙었을 때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피티녀석이 내 머리 파마를 풀고 커트까지. 성형을 시켜놨다. 점찍고 돌아올까부다.

아이들은 마스크를 끼고도 쑥쑥 커갔다. 나는 집에서 심심할 땐 파김치도 담가 봤다. 시간이 좀 지나자 마스크를 끼고 제주도 여행 정도는 갈 수 있는 세상도 오고 있었다. 막상 코로나에 걸리니 격리 되서 열이 펄펄 끓어도 누워서 드라마나 영화를 실컷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도 끝. 코로나 백신 부작용이 찾아왔다.


이석증, 어지럼증, 그리고 돌발성 난청까지

연이어 일 년이 넘는 시간동안

또 다시 나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친정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시어머니 요양병원은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바뀌며

문을 닫는다고 해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 됐다.

결국 보호자들은 피켓을 들고 시위로 뛰어들었다.

순리대로 살든, 거꾸로 살든

우리가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저 이 시대를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마지막 ‘순리대로 살든...’문장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나온 대사를 오마주해 보았습니다. 이번 주는 글을 다듬을 시간이 없어서 문장들이 좀 거칩니다. 언제쯤이면 여유 있게 연재를 이어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음 주엔 정말 최선을 다해 써올게요. 맨날 이 소리지요? 담주에도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속아도 또 속아주시는 게 소리글 연재의 맛 아니겠습니까!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