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이야기다.
정보통신병이었던 아버지 부대에 어느 날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완전무장을 하고 계속 걸으라는 것이다.
걷다보니 계속 북쪽을 향하고 있더란다.
모두가 불안해졌다. 하지만 감히 물을 순 없었다.
어디로 가는 지 말도 해주지 않고 왜 계속 북쪽으로 가라는 거지?
모두가 지친 그 밤. 아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별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넌 지금 별이 눈에 들어오니?” 모두가 어이없어 했지만, 아버지는 정말 그랬다고 했다. 긍정적인 사람은 끝없이 북쪽으로 향하는 불안한 밤에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발견한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모두가 같이 걸어간다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신이 나 있을 부류다. 설마 뭐, 38선을 넘어가기야 하겠냐며.
코로나를 겪어내던 그 시절이 딱 그랬다. 나만 힘든 건 아니었다. 모두가 북쪽으로 향하던 밤처럼 우리는 한 치 앞을 몰랐다. 바로 앞이 절벽이라고 해도 나아가야했다. 아는 게 없으니, 그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래서 권고하는 코로나 예방주사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면역억제주사를 맞는 면역저하자는 우선접종대상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많이도 돌았지만 다 같이 맞아야 하는 세상이라면 뭐 설마 나만 부작용을 겪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긍정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였다. 용감하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발목 수술도 두 번, 라식 수술도 두 번, 제왕절개도 두 번 한 사람이다. 애를 낳고는 숨을 못 쉬어서 실려 갔다. 전생에 아메바였나 보다. 잠시 잊었다. 웬만한 수술은 한 번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고, 건강판의 불운은 나를 그냥 스쳐가는 법이 없다는 걸. 예방주사를 맞은 후 내 귀가 이상해졌다. 몹시 어지러웠다. 면역억제주사를 시작한 무렵이라 그 부작용인가 했지만, 의사들은 모두 아니라고 했다.
이비인후과를 가니 처음엔 이석증이라고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타이레놀과 이석증에 좋다는 약을 먹고 푹 자고나니 좀 괜찮아졌다. 하지만 다시 움직이면 어지러웠다. 이번엔 돌을 맞추면 되겠지 싶었는데, 병원에 가니 이석증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석증 치료에도 내 귀는 반응이 없었다. 코로나 예방접종의 부작용인 경우 같다며, 어지럼증 수액을 몇 번 맞으면 나아지는 경우들이 있다고 했다.
어지럼증은 생각보다 길게 갔다. 외출도, 운전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 와중에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2차 접종도 맞았다. 얻어맞고도 또 팔을 내민 형국이었다. 그 후 2년이 넘도록 지속된 어지럼증의 원인은 결국 어떤 병원에서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석증도 아니었고, 전정신경염도 아니었다. MRI를 뇌까지 다 찍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어지럼증이 이유 없이 지속되면 메니에르로 진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니에르에 먹는 약을 시작했다. 저염식이 좋다고 해서 김치도 못 먹고, 외식도 할 수가 없었다. 소금기를 싹 뺀 음식들을 만들어 먹었다. 단 것도 좋지 않다고 했다. 몸에는 좋았겠지만 정신 건강에는 최악이었다.
나는 점점 피폐해졌다. 그 무렵은 드라마를 내려놓고, 시어머니 요양병원을 드나들던 시기였다. 차를 타면 멀미가 났다. 겨우겨우 남편 손을 잡고 면회를 다녔다. 집에 오면 누워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어지러우면 눈을 감고 자야했다. 남들처럼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도 그런 정성이 통했는지 약이 들었고 귀는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내 인생이 그리 고분고분할 리가. 긴장이 풀릴 만하니 까꿍? 하며 삶은 또 다른 유형의 문제를 들이밀었다.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그릇을 놓거나 부딪치는 소리는 다 깨지듯 들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너무 자극적이었다. 돌발성 난청이었다. 다른 일로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 접종 시기들과 자꾸만 겹쳤다. 교묘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다. 청력은 돌아올 수도 있고 안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다.
마침 그 날은 제주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가족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돌발성난청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듣는 게 가장 좋다. 나만 빼고 가족들은 제주도로 자리를 피해줬다. 스테로이드를 하루에 12알씩 먹었다. 피부에 광이 났다. 헛웃음이 났다. 40대에 ‘나 홀로 집에’를 찍다니. 나는 TV도 무음, 핸드폰도 무음,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고 3일을 보냈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사실 늘 정신없고 소란스럽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널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수도 있지만, 오늘 저녁은 차려주기 싫다.” 육아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소리를 듣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지내는 엄마의 삶은? 생각보다 행복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즈음은 전쟁통처럼 정신없던 하루하루였다. 내 평생 이런 고요는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이었다. 꿀 같은 휴식이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내 귀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지럼증도 거의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2022년에서 2023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2024년 뒤로는 어느정도 일상생활을 하며 어지럼증과 싸웠다. 그 뒤로도 간혹 어지럼증은 친구처럼 날 찾아왔지만 잘 다독이며 관리중이다.
사실 2021년은 내게 유독 잔인하게 시작된 한 해였다. 새해의 어스름이 채 걷히기도 전인 1월에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가니 이미 골든타임도 지났고 전두엽이 거의 망가진 상태라고 했다. 수술도 필요치 않고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가 들은 전부였다. 그 후 몇 년간 엄마는 고왔던 얼굴이 다 망가지도록 아빠의 재활을 도왔다.
엄마는 초능력자였다. 평생 아빠의 그림자가 되느라 앞서 걸을 수 없었고, 지팡이가 되느라 아플 겨를도 없던 엄마는 결국 기적을 일구어냈다. 나는 아파서 엄마를 하나도 도울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만 애타게 고향을 향했다. 엄마 대신 병원에서 자며 아빠를 간호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 그놈의 건강 때문이었다.
내가 매해 1월 1일이 되면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인사가 있다.
“올해는 아프지 마세요.”
“이제 그만 아프세요.”
그런 인사들의 홍수 속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가
학교에서 써온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점자를 이용해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쓰라는 거였다.
나는 설명을 찾아가며 점자를 해독해서
글자로 맞춰 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소리 없는 한 문장이 나를 울렸다.
그 한 해 동안 꾹꾹 참았던 뜨거운 마음이
왈칵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