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등에는 손톱에 긁혀 살이 패인 흉터가 있다. 중2때 친구랑 머리채 잡고 싸운 적이 있는데 그때 생긴 상처이다. 이름이 아주 특이한만큼유머감각도 뛰어나서 온 반의 분위기메이커였고 꽤 친한 친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 잘 어울리던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나를 괴롭히고 뒷담화를 하자 나도 참다 못해폭발했는데, 그 폭발한 계기는 어이없게도 당시 유명 팝 아이돌 그룹이었던 '뉴 키즈 온더 블럭'에서 내가 좋아하는 멤버를 욕해서였다. 그렇게 "도대체 너는 나를 왜 그렇게 미워하냐"고 소리지르고 손톱을 휘두르며 우리는머리채를 잡았다. 순둥이인 내가 싸운다는 소문은 복도를 타고 옆 반에 있는 내 친구들 귀에도 들어갔지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친구들은 와 보지도 않았다. 결국 우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떨어졌고 그 뒤로 남은 일년을 서로 말도 섞지 않고 원수처럼 지냈던 듯 하다.
어떤 계기로 화해를 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데, 그 나이 소녀들이 그렇듯 어느 날 문득 화해를 했고, 우리는 반 친구들의 박수까지 받으며 서로 안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다.
아빠는 자신만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몹시 아꼈지만 그래서 더 모든 것에 있어 아빠가 원하는 대로 살아주길 바랬다. 막내딸인 나는 아빠가 여행갔다오며 사다주는 외국브랜드의 옷이나 워크맨등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착장하고 다녔다. 밝은 형광노란빛 나는 티셔츠에 하얀 색의 브랜드 로고가 박힌 맨투맨에 화이트진을 입거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비가 가득 그려진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도 입었다. 친구들이 예쁘다고 하면 으쓱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늘 바지기장까지 까다롭게 간섭하고 짧은 반바지는 입지도 못하게 하는 아빠가 답답하고 싫기도 했다. 그래서 거추장스럽다는 듯 친구들에게 은근히 아빠에 대한 험담을 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빠, 엄마,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집 밖에서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군가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는 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깊이 자리잡아서이다. 관심이 없으면 입에 올릴 이유도 없다. 나의 경우에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있었는데 아빠의 과도한 관심과 통제는 싫었지만 막내딸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다 해주는 아빠의 마음은 고마웠다. 어린 나이에도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의 부담을 안는 거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많이 떨어졌던 적이 있다. 내가 뭐든 알아서 잘 한다고 믿고 있던 엄마는 처음으로 숟가락을 바닥에 던졌다고 한다. "이놈의 지지배 집에 돌아오기만 해보라"고. 그 때였다. 아빠는 엄마에게 "한 마디라도 해 보라"며 되려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아빠는 내 손을 잡고 횟집을 갔다. 내가 좋아하는 회를 가득 시켜주며 맘껏 먹으라고, 전교 꼴찌를 해도 좋으니 잘 먹고 기운 내라고 어깨를 도닥였다. 오빠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아빠가 나에게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그 횟집은 회를 내올 때 생선 대가리와 꼬리까지 모양 그대로 그릇에 놓고 살만 포를 떠서 그 위에 올렸다. 아빠의 다정함이 어색했던 나는 물컵을 만지작거리다 괜히 아직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선 대가리에 물을 살짝 부었다. 생선 대가리는 고통스러운 듯 입을 벙긋거렸다. 차마 그 살점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생선의 거무튀튀한 색깔과 번들번들하고 텅 빈 눈빛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사 준 고급 횟집의 생선만큼의 보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받았다. 나는 아빠가 늘 부담스러웠지만 착한 딸이고 싶었다. 아가씨가 되어서도 청바지 기장이 길면 안된다고 하면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었고, 빨간 립스틱이 천박해보인다고 하면 박박 지우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아빠에게 나름 무난하고 말 잘 듣는 딸이었다. 아빠에게 겉으로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빠가 영원히 내 곁에 그렇게 잔소리하며 살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 그때 그 친구의 편지 덕이었다.
부담을 느끼니 마니 하는 감정도 사실 가진 자의 여유이고 사치라는 걸 그 친구의 편지를 받고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몰랐지만 그 친구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특유의 유머와 웃음으로 이겨내며 살고 있었다. 매번 아빠 얘기를 하는 내가, 아빠가 사준 물건을 하고 다니는 내가 그 친구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친구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답을 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작해야 열 다섯살쯤 먹었을 내가 그 친구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했을까? 내가 큰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지만 가족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더 조심해야한다는 걸 진심으로 깨달았을까? 그 아이의 집안상황까지는 몰랐으니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대학생이 되고 난 후였다. 학교 대강당에서 연극을 보려고 줄을 서 있을 때 팜플렛을 돌리고 있는 그 친구를 마주친 적이 있다. 여전히 밝은 그 친구는 연극배우가 되고싶다고 했다. 지금 그 아이는 무엇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