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기숙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보통 새벽 6시면 무거운 눈꺼풀을 반만 뜬 아이들이 복도 양쪽으로 일렬로 서서 점호를 시작한다. 아침잠이 많을 수밖에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큰 딸은아침형인간이라 비틀거리지 않고 맨 앞에 줄을 선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 ‘재취침 금지’ 푯말 아래 모두 다시 잠깐의 단잠을 청할 때 샤워를 한다. 스트레스로 자주 빠지는 턱 때문에 밤에만 끼는 스프린트도 깨끗이 세척해두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아이는 생애 두 번째 수능을 쳤다.
며칠 전 전국의 수험생들이 수학능력시험을 쳤다. 올해는 유독 경쟁률이 높았다. 전국의 스무 살 전후 학생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그즈음 재수기숙학원의 아침 기상은 새벽 5시로 당겨졌기에, 수능 당일 날은 선생님들과 음식 준비하는 반장님들이 밤샘작업으로 아이들의 도시락을 쌌다. 그리고 아직은 어두운 새벽, 고생한 아이들의 인생에도 곧 해가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수백 명의 아이들 손에 도시락을 쥐어주었다. 운동장에는 긴급수송차량이라고 쓰인 버스들이 수십 대 집결해 있었고, 아이들은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버스를 탔다.
한참 시험이 치러지고 있는 시간, 전국 각지의 부모들이 하나둘씩 학원으로 모였다. 아이들이 남겨놓은 짐을 챙기러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이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여자 기숙사 복도가 생각보다 어두웠다. 좁은 복도의 양쪽에 아이들의 작은 두 발이 설 수 있을 정도의 테이프가 바닥에 일렬로 붙여져 있었다. 점호할 때 줄을 맞추는 용도인 듯 했다. 복도에는 헤어드라이어기가 네 대씩 중간 중간 비치되어 있었다. 샤워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려면 줄을 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 이름표가 붙여진 방에 들어선 순간 결국 눈물을 와락 쏟고 말았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아이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방의 온기에 마음이 더워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비장한 각오로 이곳을 나섰을까. 이 작은 방에 몇 명씩 붙어서 살면 속상한 일들도 많았을 텐데 어찌 그동안 한 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늘 웃기만 하고 이렇게 좋은 환경에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내내 울면서 짐을 쌌다.
지난 어버이날이었다. 아직 아이의 방이 비어있다는 것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아이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지가 없어서 수학 연습장을 찢어서 뒷면에 쓴 편지였다.
“요즘 날씨가 정말 좋아. 난 하늘 보는 걸 좋아하는데 학원에 노을이 잘 보이는 산책길이 있어서 정말 좋아. 저녁 시간에 친구랑 산책하고 잠들기 직전에 잠깐 책 읽는 소소한 낙으로 즐겁게 지내고 있어...(중략)...한 번 더 나에게 기회를 주고 믿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에게는 그 믿음과 응원 자체가 너무나도 큰 힘이야. 돌이켜보면 항상 믿음직스러운 행동만 해왔던 딸도 아닌데 엄마 아빠는 매번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항상 힘차게 응원해줬던 사람이야.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더 성숙해져서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왜냐면 난 우리 부모님이 그 어떤 부모님을 데려와도 하나도 안 부러울 정도로 가장 자랑스럽거든. 이건 내가 오늘 새벽에 해 뜨는 거 보면서 한 생각인데 난 내가 집안에서 받은 사랑만큼 남들에게 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다행스럽게도 가족에게 좋은 사랑 많이 받고 자라서 남들에게 어떻게 나눠야하는지 알 것 같아....”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평소에 애교부리거나 안기거나 하지 않는 아이라 자기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이날 택시에서 편지를 읽으며 어찌나 울었는지 기사님이 에어컨을 틀어줬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아마 평생 간직할 소중한 편지일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재수’는 ‘죄수’라고 했다. 요즘 재수는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 아이는 계속 미안했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도 아이 칭찬 많이 해주라고 했다. 밤이면 운동을 하고 다시 들어가 새벽 심야자습도 하고 잠에 든다고, 휴가 나오면 영양제라도 맞추라며 전화가 왔었다.
수험생들에게 행복은 성적순이다. 그 성적이 노력 순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열심히 하는데 비해 성적은 더디게 오르고, 그마저도 오르락내리락 반복할 때 좌절을 하게 된다. 그래도 아이가 기댈 곳은 스스로의 노력과 부모님의 믿음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기대치를 내려놓았다. 대신 아이가 넘어져도 받쳐줄 수 있는 푹신한 모래밭이 되어줘야겠다 생각했다.
부모란 어쩔 수 없는 자식 바보인가보다. 사실 친정엄마 생신이 수능 다음 날인데, 미역국을 끓이러 내려가려던 나에게 엄마는 도리어 내려오지 말라고 성화였다. 엄마는 손녀딸이 대입을 치르며 혹시나 당신의 딸이 힘들어할까봐, 당신의 생일을 챙기지 못한 돌덩이 같은 마음의 부담을 가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 마음을, 나는 내 딸의 마음을 걱정하는 내리사랑이 이런 것일까. 미안한 마음에 딸을 기다리는 내내 나는 차 안에서 엄마에게 보낼 꽃바구니를 골랐다.
시험이 끝난 시간, 부모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학원 운동장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다들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마침내 버스가 한두 대씩 도착하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자 모두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었다.
역시 내 딸은 울지 않았다. 이 아이는 시험을 망쳐도 운 적이 없다. 나를 닮지 않아 많이 씩씩하다. 그저 뛰어와 한번 꽉 안겼다. 이제 집에 데려가도 된다는 생각에 나는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았지만 아이는 가채점 점수를 입력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수능은 잘 쳤냐고? 열심히 공부한 만큼 몇몇 과목들은 작년보다 훨씬 성적이 올랐지만, 가장 자신 있어 했고 늘 잘 보던 수학시험을 망쳤다. 수학에서는 작년보다 도리어 떨어진 성적표를 받았다. 공대를 지망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다. 심지어 1점차이로 등급컷이 갈렸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한 이틀 웃음을 잃은 채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세상에 쉬운 시험이 어디 있겠는가. ‘물수’, ‘불수’가 아이들의 노력을 재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에게는 노력한 것보다 잘 나온 시험일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얼마나 많을까.
나는 말했다. 괜찮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니까. 아쉬움은 묻어두고 열심히 살다보면 이번에 길을 잃어 찾아오지 못했던 나머지 운이 언젠가 찾아와줄 지도 모른다고. 살아보니 그랬다. 노력은 언젠가는 보상으로 돌아온다. 인생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 그저 성실하게 살면서 혹시나 다가올 크고 작은 걸림돌들을 무사히, 건강히 잘 넘기길 바랄 뿐이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뒤 나는 드디어 친정에 내려갔다. 엄마는 늘 큰 손녀의 가장 큰 응원군이다. 그래서 마음 편히 엄마와 수능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나도 모처럼 응석받이 딸이 되어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온갖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엄마 밥에는 영양제를 탄 것 같은 묘한 힘이 있다. 먹으면 힘이 난다. 이래서 내 딸도 기숙학원에서 휴가 나올 때면 그렇게 집 밥만 찾았구나 싶었다.
문득 식탁 위에 엄마가 공부하는 영어노트가 보였다. 엄마는 영어까막눈이다. 그런데 칠십 일곱의 나이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그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이다. 아빠의 사진이 있는 방 불을 늘 켜두고 아빠와 살 때처럼 여전히 뭔가를 배우고 움직인다. 교리공부도, 운동도, 기도도 모두 지치지 않고 해내고 있다.
참 예쁜 글씨체다. 처음 영어를 쓰는 사람이 어쩜 이렇게 글씨가 예쁜지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내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I can do everything.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엄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내 딸도 그럴 것이다. 웃음이 났다.아이가 내일까지 논술시험이 남아서 나는 여전히 수험생 뒷바라지 중이다.오늘 하루도 내일 하루도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면세상이 조금 더 여유로운 곁을 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