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왔다. 한 시간이면 큰 아이를 대치동 학원가에 실어다주고 올 수 있으니 집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면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치동 한가운데에 아이를 내려줄 때부터 방광에 신호가 왔다. 당혹스러웠다. 아니 이건 배신이다. 루틴에서 벗어난 행태다. 내비게이션을 흘긋 보니 집까지 이십 여분. 그래, 참아보자. 낮에 친구들과 마신 차 때문일 수도 있고 막히기 시작한 교통체증 때문에 긴장했을 수도 있지. 힘 풀자, 릴렉스. 아닌가, 쪼여야 하나?
방광이 이 꼴이 된지 벌써 2년은 된 것 같다. 나는 강직성 척추염 환자다. 나름 희귀 난치성 질환이라 산정특례를 받는다. 이 병은 편도체가 고장 난 사춘기 소녀의 마음처럼 면역이 컨트롤되지 않는 병이다. 온 몸이 돌아가며 이유 없이 아프다. 그래서 면역억제 주사를 이 주에 한 번씩 맞는다. 냉장고에서 주사를 꺼내 허벅지에 꽂으면 찌르르 약이 들어가는 느낌이 차갑다. 주사는 아프지만 관절은 많이 좋아졌다. 이정도면 감사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몸뚱이다. 최근에 방광염이 계속 재발하고 약도 듣지 않아 섬유근육통까지 진단받았다. 어찌됐건 나는 화장실을 자주 가서 과민성 방광약도 먹고 야간뇨를 막아주는 항우울제 계통의 약도 먹고 항생제도 자주 먹는다. 방광 유산균과 콜레스테롤 약 등 매일 시간 맞춰 약 먹느라 배가 부를 지경이다.
이 정도로 약으로 달래고 어르며 살고 있으면 방광도 양심은 있어야지, 한 시간도 안 돼서 화장실에 가자는 건 매너도 뭣도 아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십 여분 안에 집에 가는 게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점점 도착 예정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 차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 어떤 휴대용 화장실이 되어줄 만한 게 있을까. 구조상 먹다 남은 생수병도 안 되겠고 충분한 휴지도 없었다. 격하게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여자보단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친정엄마 나이쯤 될 거 같은 할머니 모델들이 입고 날씬한 뒤태를 보여주며 ‘디땡땡 하세요~’하고 노래 부르는 그 요실금팬티를 차에 사놔야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그래도 다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도착예정시간은 40분 후로 늘어나 있었다. 넓은 간선도로 한 가운데 차선이라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이제 내 방광은 독이 오른 복어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작은 충격에도 자칫하면 터질 것만 같았다. 방지턱 앞에서는 온 몸에 힘을 풀어야 했다. 그래야 내 방광도 유연하게 사태를 대처할 수 있었다.
오십 번쯤 고민했다. 싸고 말려야 하나? 세차장에 가면 애기가 쌌다고 해야 하나? 그럼 조금만 싸야 하나? 진짜 그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버려야 하나? 치욕스러웠다.
사실 중년이 다가오면 가장 민감해지는 장기 중 하나가 방광이다. 내 나이쯤 되면 자연분만을 했건 제왕절개를 했건 관계없이 줄넘기는 사치다. 신호등이 바뀌든 버스가 지나가든 일단 뛰는 것도 포기한다. 중년의 발걸음이 젊잖아 보이는 건 인품이 깊어져서가 아니라 방광이 예민해져서 느긋이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대에 맥주를 물마시듯 마시고도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고 1시간을 서서 고음을 내지르며 아랫배에 힘을 쥐어짜도 괜찮던 그녀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뭐 아직도 그러지 않다는 내 또래가 있다면 진심을 다해 존경한다. 그들은 방광궤적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상위 1프로다. 나이가 들면 돈으로도 쉽게 사지 못하는 게 머리숱, 방광용량, 납작한 아랫배 같은 젊음의 영역이다. 게다가 나는 심각한 재발성 방광염 환자이니 나는 이 분야 대한민국 하위 1프로인 것인가!
에이징 커브(Aging Curve)는 주로 스포츠에서 선수가 늙어서 능력이 감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운동선수도 사람이기 때문에 나이에 따른 노화를 겪는다. 그와 함께 운동 능력도 성장하고 감퇴하는데, 그 정도를 분석해 함수 그래프로 수치화하면 포물선 커브 모양을 그린다고 해서 붙은 용어이다. 중년의 에이징 커브를 떠올렸다. 도대체 내 커브는 얼마나 급격히 휘어지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아무리 방광은 위급해도 내 머릿속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멀리 롯데타워가 보이기 시작했다. 집이 가까워진다는 신호였다. 일단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은 혼미해졌다. 그렇지만 이젠 어디 들어가서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입을 뗄 바에는 닥치고 액셀을 밟는 게 나았다. 그냥 빨리 집에 가야 했다. 나는 이 동네에 십사 년째 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집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계산했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에 마침내 주차를 했다. 천주교 신자면서 그동안 냉담했던 시간을 반성하며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제 남은 관문은 엘리베이터. 우리 동네는 엘리베이터가 한 대이다. 30층이 넘기 때문에 운 나쁘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10분도 기다릴 수도 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며 철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냉담자의 기도도 들어주시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렸다! 희망이 보였다. ‘이제 1층에서 아무도 타지 않고 18층까지 올라간다면 성공이다!’ 다리를 꼬고 힘차게 버튼을 눌렀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작 1층에서 문이 열리다니 나는 절망했다. 열리는 문 사이로 타는 남자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큰 딸의 초등 동창생이다. 대학생이 된 건장한 남학생이다. 사실 이 앞에서 내가 일을 친다면, 큰 딸이 이번에 재수해서 그 남학생과 같은 대학을 붙어도 보낼 수 없게 된다. 참아야 했다. 아예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여자였다면, 혹은 내 또래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다면 이해해주실 텐데...남자사람 앞에서 이건 아니다. 나는 앞을 노려보며 다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어쨌든 성공했냐고? 당연하다. 나는 성공한 여자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나는 극복하고야 말았다. 그러니 당당하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은 소변으로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언젠가 다가올 일이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내 방광을 믿어보련다. 이렇게 하루하루 내 방광을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