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정하지만 엄마가 되었습니다.

by 소리글

나를 태운 구급차 운전기사는 테토남이었음에 틀림없다.

방지턱 따위는 그대로 들이받듯이 뛰어넘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방금 제왕절개를 한 산모였다.

제왕절개는 피부를 절개하고, 그 아래 근육층, 자궁까지 여러 번 배를 가른다.

그리고 다시 꿰맨다. 상식적으로 수술 직후는 건드리기만 해도 몹시 아프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나는 단전에 힘을 줄 수도 없었고 찢어질 듯 통증을 느꼈다.

결국 수술 후 하루 이틀 안에 나온다는 방귀가 구급차 안에서 ‘뽕~’ 나와 버렸다.

그럼에도 망연자실한 나를 싣고 구급차는 대학병원을 향해 계속 달렸다...


그날 밤 그 커다란 대학병원 병실에는 각자의 이유로 모인 많은 산모들이 있었다. 대부분 진통중인 이들이었다. 나는 분명 출산을 했으니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심장 검사기를 달고 있었다. 다행히 환자복을 부탁해 옷은 걸쳤지만, 기약 없이 그저 누워만 있었다. 눈물이 났다. 허전했고, 아기가 몹시 보고 싶었다. 그 때 문 밖으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한 남자였다.


아빠였다. 아빠는 문 밖에서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기차를 타고 올라온 것이었다. 아빠는 심장에 부정맥이 있다. 그래서 죄인이 된 것 마냥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눈 작은 것만 물려준 줄 알았는데 쓸데없이 부정맥까지 물려줬다는 죄책감이 들었던 게 틀림없다. 원래도 내 천(川)자로 깊이 새겨진 미간 주름이 더 깊어져 한숨만 쉬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나는 웃었다. 살았잖아, 아빠. 그럼 됐지. 어서 가 봐. 남자는 여기 못 들어와.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실은 나 이제 엄마 됐고 아빠는 할아버지 됐다며 놀리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빠는 훗날, 그날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있어서 고마웠는데.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이었다. 다음날 오후가 되자 나는 아빠보다 아기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 동안 내 심장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퇴원시켜달라고 졸랐고, 개선장군처럼 원래 병원으로 다시 구급차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수술한 배가 전날부터 계속 너무 아팠다. 도저히 못 참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 아무리 제왕절개지만, 왜 이렇게 배가 계속 아파요?”

“잠시만...요...어? 누가 진통제를 꺼놨는데요? 하나도 안 들어갔어요!”


알고 보니 전날 밤 응급으로 이송될 때 구급차 베드로 옮겨 타면서 진통제 들어가는 링거 조절기를 누가 잠시 꺼놨던 것이다. 누가? 그 누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병원 간호사는 그걸 몰랐나보다. 난 말 그대로 생으로 제왕절개의 아픔을 다 견뎠다는 소리다. 약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통증이 사라지자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보통 자연분만을 하면 한동안 똑바로 앉지를 못한다. 아무래도 회음부 절개나 아기를 낳은 후 아픔으로 인해 도넛 방석에나 겨우 앉는다. 대신 잘 걷는다. 그렇다면 제왕절개는 어떠할까? 제왕절개는 피부를 째서 아기를 꺼냈기 때문에 상처가 아래로 심하게 당기는 느낌이 나고 일어서기조차 힘들다. 걷는 건 거의 초죽음이다. 진짜 상처 밖으로 장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고통이다. 그래서 갓 태어난 기린처럼 어기적어기적 걷기 마련이다. 대신 앉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걷기도 잘 걷고 앉기도 잘 앉았다. 진통제 없이 하루를 버틴 덕에 나는 괴물 같은 회복력을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잘 지나가는 듯 했다. 문제는 아기였다.


아기는 한 달 일찍 태어났지만 나름 건강했다. 하지만 첫 날부터 엄마랑 떨어져 있어서인지 독립심부터 획득했다. 절대 엄마의 젖을 물지 않았다. 앙 다문 입술에서 그 고집을 예상했어야 했다. 그녀는 내 모유를 거부했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게 젖꼭지를 구분하다니, 신생아치고 머리가 좋다는 착각이 들었다. 여하튼 아기는 오로지 분유만 먹으려 들었다. 나는 한 달여를 노력했지만, 내 모유는 기껏해야 한 번에 20ml 유축이 최대치였고, 남들 앓는 유선염도 실컷 앓았지만 결국 수유를 포기해야 했다.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허리통증이 남았다. 원래도 디스크가 심했던 허리로 사흘을 진통했더니 완전히 망가져 아기를 안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정말 뼈에 바람이라도 든 건지 온 몸이 다 아팠다. 관절이란 관절은 다 욱신거렸다. 육아에 지쳐 아픈 게 아니었다. 등에 센서가 붙어 ‘나를 안고 재우라!’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기를 어르거나 달래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친정도, 시댁도 다 지방이라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당시 다양한 인성의 산후 도우미들을 만나며, 세상을 새로 배워가고 있었다. 세상은 돈이 움직였다. 자본주의 힘은 육아에서 가장 큰 빛을 발했다. 엄마가 시장에서 코끝이 까매지도록 힘들게 벌은 돈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번다고 나한테 관심도 없냐며 철없던 시절 큰 소리를 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친정엄마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산후 도우미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아기를 키웠다. 허리가 너무 아파 차라리 아기를 맡기고 내가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게 그나마 나았다. 물론 그것도 허리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 울었고 허리를 굽힌 채 걸어 다녔다. 아기를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암맘마’를 만났다.


암맘마는 한 달 간의 산후 도우미 시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우리집에 온 가사도우미 아줌마였다. 나중에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서, ‘암맘마’라고 불러서 암맘마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커다란 눈, 앞머리를 곱게 세우고 스프레이로 고정을 한 단발머리 아줌마였다. 헤어스타일이 딱 1980년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놀랍게도 미용실 원장을 오래 했다고 했다. 암맘마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집 청소를 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싹 마무리를 해줬다. 내가 업체에 내건 계약 조건은 집안일은 최소로 끝내고 아기를 많이 봐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저는 아기 안 좋아해요. 미용실에도 아기 손님 오면 그냥 돌려보냈어요.”


아기 봐달라고 불렀는데, 아기를 안 좋아하다니...당시 아기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 귀 밑이 매일 찢어졌다. 피가 줄줄 흐르는데 나는 혼자 목욕을 씻길 수가 없어 안고 우는 수밖에 없었다. 우울감이 심해졌다. 나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자리 잡아보려 노력중인 남편에게는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나를 전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아줌마는 아무리 깔끔해도 더 이상은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늘 그렇듯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암맘마도 나도 상상 못했다.

그녀가 우리집에서 4년이 넘도록 큰 애를 함께 키워줄 줄은.

지금도 생각하면 그녀는 내가 가장 아프고 우울했던 시절에

친정엄마처럼 곁에 있어준 고마운 은인이었고 생명줄이었다.

나는 그녀 덕에 산후 우울증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부실하지만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맘마의 언니가 암맘마의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