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이 오고 암맘마가 퇴근을 하고 나면 아기는 밤새 울었다.
마치 엄마가 퇴근한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아토피가 심해서 잠을 못 이루는 건지,
암맘마의 손길이 그리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다가오면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아기를 암맘마에게 넘겼다.
암맘마가 능숙하게 업고 재우는 아기를 보며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안아 재우고 싶었다. 아무리 아파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내 허리와 발목, 어깨, 모든 관절들은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 아기는 내 품에 없었다.
암맘마는 아기를 싫어했지만 다행히 우리 첫째를 진심으로 예뻐했다. 첫 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녀가 보기에, 아기의 실눈은 똑똑하고 다부진 눈매였고, 까무러치도록 울어대는 성격은 공부를 잘 할 깡이었다. 그냥 콩깍지가 콱 뒤집어 쓰였다. 이웃집 아기가 머리숱 많다고 자랑하며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나오면, 다음 날 우리집 애 머리는 한 쪽당 5갈래씩, 10갈래로 묶어 나갔다. TV에서 뿡뿡이 아저씨가 김장 광주리 같은 바구니에 아이를 넣고 놀아주면, 다음 날 광주리 2개를 사들고 1시간동안 전철을 타고 왔다. 암맘마에게 있어 우리 아기가 어디 가서 기죽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암맘마가 정확히 어떻게 우리집에 오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빚을 갚기 위해 미용실도 넘기고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했던 듯하다. 하지만 언니가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동생의 돈을 갖고 사라져버리자 암맘마는 무너져 내렸다. 생활력 강한 그녀였지만 가족에 대한 배신감은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남편은 기꺼이 돈을 꿔줬다. 이미 우리는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유대는 더 단단해졌고, 암맘마는 우리 가족을 정말 열심히 도와줬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급히 내려가는 우리 뒤를 쫓아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녀는 일정상 못 올 상황이었지만 아기가 눈에 밟힌다며 기어이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왔고, 초상을 치르는 내내 시댁에서 아기를 돌봐 주었다.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관계가 처음인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이었다. 원래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게 첫사랑 아닌가. 도우미 아줌마와 애기엄마 사이에 찐우정이 싹텄다. 나는 우울과 좌절의 늪에서 팔을 뻗었고 암맘마는 그 팔을 힘껏 잡아당겨주었다.
그래도 힘들 때면 나는 친정에 내려갔다. 그러면 친정아빠와 엄마는 교대로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재워줬다. 아기 우는 소리에 너무 힘들어하던 나를 피해 밖으로 나가 서성이며 재워오기도 했다. 나는 밤마다 우는 아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만 좀 울어라 아가야. 니는 너거 엄마 딸이지만 너거 엄마는 내 딸이데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으로 펑펑 울었다. 나는 아기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독히도 힘들었던 날들이었다.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는 음식 알레르기가 발견됐다. 계란 흰자가 가장 심했다. 어떨 땐 쌀부터 모든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조금씩 나오기도 했다. 나는 대학병원에 아이를 업고 다니며 긴 치료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둘째 유모차를 밀고 다녔다. 아이 둘 다 알레르기 치료를 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5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6살 때 처음 빵을 먹는 아이를 보고 나는 눈물이 났다. 정작 아이는 생각보다 별로 맛이 없었는데 엄마가 너무 울어서 말을 못했다고 했다. 그 후에는 큰 아이의 틱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다녀야 했다. 틱은 중학교를 가며 없어졌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너무 오랫동안 내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일단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며 내 몸무게는 몇 십 킬로가 늘었다. 모두가 내 몸을 걱정했지만 나는 오직 애들 얼굴만 보였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잘 커주면 그게 너무 좋았다. 허리가 아프면 약을 밀어 넣었고, 어깨가 아프면 주사를 맞았으며, 목디스크가 오면 도수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돌려막기를 하는 동안 내 건강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발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발목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한의원의 단골손님이었다. 몸통에 비해 그나마 가늘었던 내 발목은 늘 힘없이 휙휙 돌아갔다. 염좌로 퉁퉁 부은 발목은 사혈침으로 검은 피를 빼내고 부황을 뜨면 한결 가벼워졌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발목을 삐끗하면 절뚝거리며 혼자 한의원으로 갔다. 그렇게 반복되던 염좌는 발목 불안정성을 유발했다. 그러다 20대 중반, 한참 대학원 논문을 쓰고 있던 무렵, 돌길에서 심하게 삔 발목은 쉽게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3개월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나는 대학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발목인대가 휴지조각처럼 너덜너덜 합니다.”
인대는 한번 끊어지면 양쪽으로 말려 올라가며 혼자서는 붙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인대가 거의 끊어진 상태였지만 지금 발목 수술을 하면 회복기간이 너무 길어진다며 의사는 주사를 권했다. 주사는 끊어진 공간에 염증을 일으켜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주사치료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머리감다 삐끗한 허리디스크까지 겹쳐 6개월을 꼬박 집에 누워만 있었다. 심심했던 나를 보고 미국에 있는 친한 오빠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한 친구가 나섰다. 나는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랑에 빠져 초고속 결혼을 했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나는 미국에 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참 신기했다. 숨겨둔 애가 있을지, 현지처가 있을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어떻게 여길 왔을까 싶었다. 발목은 뛰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대학원에 등록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신이 났다. 하지만 내 발목은 그 후로도 평생 나를 괴롭히는 원흉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마구 뛰고 싶었지만 내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기나긴 내 발목신경염의 역사는 그 때부터였다. 그 후로 출산과 육아를 지나며 잊어보려 했으나, 내 발목은 그 후로 2016년, 다시 한 번 끊어졌다. 그땐 진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던 내 젊은 날은 건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후회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건 그 시간 속 나의 무지함, 어리석음에 대한 때늦은 감정일 뿐.
그 시절을 꿋꿋이 살아낸 나는 언제나 기특하다.
후회도 그 시간을 지나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나는 모든 순간을 열심히 살아냈다.
출산과 육아가 내 몸을 많이 아프게 한 계기이긴 했지만,
알고 보니 내 몸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레고처럼 삐뚤어진 채 서 있었다.
그 위로 계속 내 병들은 쌓아지고 있었다. 기우뚱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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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육아’ 브런치북인 줄 아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릴 적부터 앓아온 병 이야기들을 시간 순서대로 풀어가는 게 맞았는데
출산이야기부터 시작하면서 스텝이 꼬였습니다. 자빠졌습니다.
어제는 브런치에서 제 예전 글을 카카오톡 채널 광고에도 내줬는데 말이죠.
이렇게요!! (잠시 광고타임)
브런치가 앞으로도 응원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번 화는 계속 더 글이 안 고쳐져 고민만 하다 업로드 시간이 됐네요.
다음 화부터는 좀 더 잘 써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