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이야기 (1)
손 많이 가는 언니. 손만(많)언.
그게 요즘 내 별명이다.
나는 부실한 발목 때문에
계단을 많이 오르내리지도 못하고
많이 걷지도, 뛰지도 못한다.
그러니 나와 어디를 가려고 하면 자동차를 대령하거나
많이 걷지 않는 최단거리를 계산해 안내하거나
혹은 그냥 나랑 놀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럴 때마다 착한 내 주변 사람들은 늘,
“이 언니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언니야!”
투덜대면서도 나를 굳이 데리고 다닌다.
그러면 나는 심드렁하게 답한다.
“인생 눈으로만 즐기면 되지, 힘들게 뭐 하러 산에 올라가고 수영하러 가나?”
입만 나불거리는 인생이다.
요즘 내게 외출은 드라이브 정도가 딱 좋다. 오른쪽 발목이 안 좋아 운전도 오래 못한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외향적인 성격 탓에 어디로건 돌아다니는 걸 즐겼다. 수영도 물개처럼 좋아했고, 맨날 집밖으로 돌아다녀서 아빠가 “너 정치할거냐?”라고 묻곤 했다. 그런데 20대 중반, 내 발목이 내 발목을 잡았다. 어릴 때부터 자꾸만 접질리던 발목은 심한 불안정증으로 결국 인대가 너덜너덜해졌다. 수술은 가까스로 피해갔지만 한 번만 더 다치면 바로 수술이라는 말에 조심조심 살아야 했다. 통증은 항상 친구처럼 곁에 있었다.
그래도 6개월을 누워 있다가 결혼식장에 들어갔을 때는 컨디션이 좋았다. 내 평생 그렇게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말이 잘 통해 결혼한 남편은 미국에서 나를 그야말로 ‘모시고’ 살았다. 아빠가 리콜은 안 된다고 선언한 뒤였다. 내가 입학한 학교는 집에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발목이 아파 다니기 힘들 때면 남편은 본인 논문 쓰느라 바쁠 때도 나를 실어 날랐다. 수업에 발표라도 있는 날이면 나는 징징 울며 밤을 샜다. 남편은 우는 나를 또 싣고 학교까지 가 교실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한인마트로 가 카트를 타고 달리면서 장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과자들을 사와선 교실 앞에서 대기하곤 했다. 나는 남편이 사온 달달구리들을 먹으며 집으로 오는 길이 그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스키장이 유명한 콜로라도였지만 스키는 타지 못했다. Rocky mountain 클라이밍도, 하이킹도, 나는 아무 레저스포츠도 즐기지 못했다. 그래도 학기가 끝날 때면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어디로든 여행을 다녔다. 남편은 늘 내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아냈다. 그렇게 반쪽짜리 여행이라도 누리며 나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워갔다. 많이 걷지 못해서 슬프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올 A로 졸업을 했다. 그리고 졸업식 다음 날, 임신을 알았다. 딱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다. 굳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던 애국자 남편은, 졸업식 박사모도 쓰지 않았다. 논문만 내던지다시피 미리 제출하고 만삭의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 둘을 낳고 어느 정도 키울 때까지 다른 관절들이 많이 아파도 발목은 무리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있었다. 그냥 “저 발목이 안 좋아요. 조심해야 해요.”정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날들이었다.
정확히 2016년 가을이었다. 초1이었던 둘째아이의 수학학원이 늦어 집에서 급히 뛰쳐나오던 길이었다. 둘째는 킥보드를 타고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우리 동 1층 현관을 나서면 돌길이 펼쳐졌다. 빨리 데려다주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낙엽 깔린 그 돌길을 허겁지겁 내려가는데, 아이가 “엄마, 지금 몇 시야?”라고 물었다. 그 답을 해주려고 뒤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발목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돌아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내 몸은 돌길 옆 나무에 처박혔다. 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너무 심한 통증이 오면 어디가 다친 건지 감도 오지 않는다. 분명 오른쪽 발목이 삔 거 같은데, 내 발과 안쪽 발목이 닿은 느낌이었다. 발목이 그렇게까지 돌아갈 수가 있나?
내 발목은 튀어나온 돌과 푹 들어간 흙더미에 균형을 잃고 완전히 돌아갔던 것이다. 그 날의 통증은 내가 살면서 겪은 어떤 것보다도 심했다. 도저히 아이를 데려다 줄 수 없어 나는 절뚝이며 집으로 도로 올라왔다. 아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가 자기를 뒤돌아보다 넘어지는 모습을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에 한동안 아이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너무 미안했다.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만 같았다.
문제는 2달 뒤, 우리 가족은 남편의 안식년을 맞아 1년간 미국으로 떠날 계획 중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니 뼈는 무사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보통의 발목 염좌에 할 수 있는 치료들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달, 두 달... 이제 2주 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발목 붓기는 점점 부어오르고 통증은 심해졌다. 결국 MRI를 찍었다. 그 결과, 나는 인대가 끊어지고 삼각인대까지 다 파열된 상태였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의사가 모를 수 있었을까. 의사는 내가 그렇게까지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줄 몰랐다고 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아파보이지 않았던 거다. 통증을 잘 참는 것도 문제냐며 따지고 싶었다. 삼각인대가 파열되면 바로 응급수술을 할 상황인데, 내가 그냥 웃으며 진료실에 들어간 탓이라니. 수술을 하자니 남은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진통소염제를 가득 몇 달치 받아들고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남편만 미국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수술 뒤에는 재활도 필요한데, 그럴 여유는 없었다.
원래 그 1년 후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쯤 맞춰 집 인테리어를 다시 할 예정이었다. 일 벌리기 좋아하던 나는 벌써 업체와 견적까지 다 내놓은 상태였고, 집 냉장고를 비우고 잔짐도 정리해 놓고 떠나야 했다. 그러면 귀국하기 1개월 전, 보관이사를 하고 공사가 시작될 계획이었다. 친한 지인들이 보관이삿날 와서 진두지휘를 해주기로 했다. 1달간의 공사기간 동안, 다들 들여다보고 잘 진행되는지 내게 알려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손만언이다. 발목이 그 지경이 되자마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공사는 착수금까지 다 낸 상태라 엎을 수도 없었고, 김치냉장고를 비울 수도, 찬장 정리를 할 수도, 집 청소를 할 수도 없는 발목상태였다. 나는 그냥 누워있다 떠나야 했다. 나를 보내고 눈물을 닦고 난 내 지인들은 바로 이어서 우리 집 냉장고를 닦아줘야 했다. 모두 나서서 묵은 김치를 버리고, 오래된 쌀은 떡을 해먹고, 설탕은 왜 이리 많이 쟁였나 구시렁대면서도 다 치워줬다. 보관이사 견적도 돌아가며 봐주고, 공사 중 인부들의 간식도 알아서 챙겨줬다. 우편물 관리도 해 주고 집에 문제가 없는지 가끔 들러서 봐주기도 했다. 따로 들렀다가 서로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절뚝이는 손만언을 외면하지 않았다. 나는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빚을 지고 말았다.
미국 가기 전이면 꼭 이렇게 발목을 다치는 건가 생각도 들었다. 야속한 내 마음도 모른 채, 발목 통증은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발 1년만 잘 버텨주길. 미국에서 아이들 라이드는 왼발로 운전하면 되겠지. 어떻게든 버텨지겠지. 나는 늘 그렇듯 긍정적인 마음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기다란 찍찍이 깁스를 차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1년이 불러올 여파가 어떨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싶었다.
별일은 아주 많았다. 다양하게 말이다.
1년 뒤 한국에 돌아와 수술을 받았지만 통증은 계속됐다.
그리고 1년 뒤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도 통증은 변함이 없었다.
수술은 잘 됐는데 이상하다며 의사들이 갸웃댔다.
그들의 결론은 내 발목 통증이 발목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What the Heck? 한국말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