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이야기(2)
버지니아주는 내가 1997년에
어학연수를 갔던 곳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갔었다.
남편은 2017년 한 해, 온 가족이 갈 곳으로 버지니아를 골랐다.
어렴풋하게만 기억하는 내가 살던 아파트도
몇몇 기억의 조각을 이어 찾아줬다.
행복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추억 속을 거닐어볼 수 있다는 게.
아이들도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해줬다.
단 한 가지, 내 발목은 행복하지 않았다.
하필 인대가 끊어진 발목이 오른쪽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당시 아이들은 차로 15분 정도 거리의 초등학교로 통학을 했다. 갈 때는 스쿨버스가 있었지만, 하교 후에는 차로 데리러 가야 했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기 위해 발목을 까딱거리는 게 쉽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찾아왔고, 붓기는 항상 따라다녔다. 운동화 입구 쪽에 발목이 닿으면 쓰라렸다. 그래서 발목을 감싸는 형태나 아예 슬리퍼처럼 발목이 노출되는 형태를 신어야 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내 신발치수는 265다. 한국의 여성신발 코너에는 사이즈 자체가 없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마음껏 신발을 살 수 있었다. 디자인도 다양했다. 내 별명은 지네가 됐다. 지네는 다리가 100개다. 일단 신을 수 있는 형태의 265신발은 다 쓸어 와야 했다. 내 눈은 신나서 번뜩였다. 운동화가 편하지만 발목에 스치기 때문에 무조건 아웃. 나는 슬리퍼와 부츠형태만 주워 담았다. 사실 쿠션 편한 운동화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침 러닝을 하던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치마에 부츠를 신고 애써 괜찮은 척, 씩씩하게 굿모닝을 외쳤다.
다치고 보니 생각보다 발목은 하는 일이 많았다. 1년간 살기로 한 미국 집은 2층집이었다. 화장실과 방들은 1층, 부엌과 거실은 2층에 있는 작은 타운하우스였다.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계단을 오르내려야했다. 발목이 나을 수가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매일 아침 아이들 도시락을 싸러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고통스러웠지만 약기운으로 버텼다. 소염진통제를 장복할수록 점점 얼굴도 온몸도 동그랗고 복스럽게 변해갔다.
애들이 학교가고 나면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발목으로는 어디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변 이웃들과 친해져 그 차를 얻어 타고 놀러 다녔다. 아프다고 집에만 있으면 우울했다. 오후에는 아이들 픽업을 갔고, 피겨 레슨도, 학원 라이드도, 마트도 다 다녔다. 이 정도면 오른쪽 발목에게 월급이라도 줘야 할 판이었다. 나는 버텨줘서 고맙다고 가끔 발목을 토닥거렸다.
그러다 양발운전을 하게 됐다. 원래 양발을 사용해 운전하는 방법은 위험하다. 긴급한 상황에 잠시라도 헷갈리면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왼발보다 오른발이 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른발을 아끼기 위해서는 양발을 써야 했고, 원래도 운전은 자신 있던 나였기에 남들이 못 느낄 정도로 부드럽게 양발운전을 하게 됐다. 문제는, 양발운전을 하면 온 몸의 축이 틀어진다는 데 있다. 운전석이 오른발 운전에 맞춰져 있기에 양발로 운전을 하면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간다. 나는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등이 너무 심하게 아파서 깨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때는 원인을 몰랐다. 그냥 늙어서겠지 했던 거 같다. 40대 주제에. 그래도 미국 전역을 쏘다녔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오면 동부를 관통해 캐나다까지 여행도 갔다. 설탕이랑 김치 정리해주던 고마운 이웃들도 왔고, 강아지까지 데리고 놀러온 동생네도 있었다. 나는 어딜 가든 발목 약을 부적처럼 붙들고 다녔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까지 찾아와준 걸 생각하면 행복했다. 나는 그랬다. 몸은 아파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기운을 얻었다. 내가 진짜 우울해지는 날은 아마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날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우리 가족은 무사히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했다.
오자마자 발목 수술을 진행했다. 다친 부분에서 인대도 끊어졌지만 뼛가루가 떨어져 나와 그것도 제거해야 했다. 수술은 원래 병을 진단받았던 그 의사가 맡았다. 정말 신경 써서 해주겠다는 말을 믿었다. 전신마취를 다시 하는 게 무서웠지만 출산 때의 악몽은 되풀이 되지 않게 병원 측에 신신당부를 해 놨다. 수술만 하면 모든 게 다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수술 후, 재활도 받고 치료도 열심히 받았지만 통증은 그대로였다. 심지어 더 심해졌다. 수술한 의사는 이미 병원을 옮긴 후였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 때부터 백방으로 병원을 알아보고 다녔다. 의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수술할 때 신경이 손상돼서 절대 복구될 수 없다는 병원도 있었고, 누가 발목을 그리 쉽게 수술하느냐며 소리 지르는 병원도 있었다. 발목전문병원이면서 그랬다. 난 반박도 못하고 울었다. 결국 대학병원으로 가서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유명한 교수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뼈가 자라서 자꾸 찌르는 게 원인이에요. 뼛조각을 다 끄집어내고 뼈를 더 깎으면 돼요. 간단해요."
믿고 싶었다. 한 번 더 수술대에 올랐다. 이미 소염진통제와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계란형이었던 얼굴이 보름달이 됐다. 약도 주사도 그만 이별하고 싶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런 형벌을 받는 걸까.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렇게 수술을 더 받았지만 나는 통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드라마 작가 교육원에 등록을 한 상태였다.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 믿고 덜컥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다니는 고된 길을 선택해놓은 상태였다. 내가 생각해도 난 대책 없는 인간이다.
보조기를 찬 상태로 면접도 봤고, 수업도 그렇게 발목 보호대와 함께 다녔다. 처음 배우는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었다. 새벽까지 밤새워 대본도 써보고, 합평이란 것도 해보고, 스터디도 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아까웠고 소중했다. 술을 마시는 자리도 자주 있었고, 40대 늦은 나이라 체력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 해보고 싶었다. 오래 앉아있거나 전철을 오래 타면 발목이 퉁퉁 부어도 그냥 그건 내 하체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내 상체는 신이 났다.
그렇게 쭉쭉 승급을 했고 반장을 연달아 맡았다. 목소리가 커서 자꾸 시키는 거 같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싶었지만 신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기초, 연수, 전문반까지 올라갔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온 세상이 셔터를 내렸다. 가족들끼리도 마스크를 끼고 문을 걸어 잠가야 했다. 전문반에서는 줌수업을 자주 해서 내 발목은 덜 혹사당했지만 점점 등이 아파왔다. 엉치뼈쪽도, 어깨도 아파왔고, 고관절 때문에 돌아누울 수도 없는 날들이 계속 됐다.
자다가 1, 2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뒤척이려고 하면 등 쪽에서 칼로 베어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울면서 겨우 한번 옆으로 누우면 그 상태로 또 등이 굳어졌다. 낮에는 멀쩡해져서 돌아다닐 수 있는데, 밤만 되면 고통이 찾아왔다. 대본 쓰느라 너무 무리해서, 오래 앉아있어서 스트레스로 그런 거겠지 싶었다. 정형외과를 계속 찾아갔다. 스포츠 재활도 받고, 목디스크 치료도 받았다. 주사도 맞고 약도 먹는 게 너무 익숙해진 어느 날이었다. 의사가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내 통증 부위들이 너무 자주 옮겨 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발목도 그렇고, 아무래도 다른 원인이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의사는 진지했다.
강직성 척추염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척추(를 비롯한 여러 부위)에
염증이 발생하고 점점 굳어가는 병.
면역이 날뛰어서 온 몸을 돌아다니며
염증을 일으키는 희귀난치성 질환.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 질환.
류마티스 내과를 가보라고 했다.
유전자검사도 해줄 거고
엑스레이도 찍어줄 거라며.
천장관절이 하얗게 변한 걸로 진단을 한다고 했다.
혼자서 염증이 생기지 않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