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래블러 Jun 18. 2023

독일 가족 #25

Ep25.│트리아카스텔라에서 독일 가족과의 만남


전날 파리와의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우리는

오늘만큼은 꼭 쾌적한 숙소에서 자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해발 1440m로 까미노에서 제일 높았던 피레네 산맥 다음으로 높은 

해발 1330m 산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캄캄한 새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는 

우리들의 휴대폰 불빛만이 캄캄한 공백을 채워갔다. 

높은 산길에 점점 숨이 차오르고 위쪽을 바라보던 고개는 

어느새 바닥을 향한 채 거친 숨만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어느새 진한 파란색의 물감이 퍼져나가며 

산 위의 풍경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산기슭 사이사이로 구름들이 

마치 호수를 연상시키 듯 가득 메운 채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거친 숨소리만 내뱉던 우리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까미노를 걸으며 힘들고 지쳐 수없이 주저앉고 싶은 적도 많았고

편하게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매 순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을 뽐내며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마다 

'그래, 이 풍경을 못 보고 다른 사람 블로그나 sns로 봤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이곳을 걸어온 나에게 기특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다 오늘도 걷길 잘한 나에게 

칭찬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남기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만난 마을 세브레이로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오전 11시부터 영업을 하기에 일찍부터 출발한 우리는 자전거를 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천천히 걸어가며 이 길을 조금 더 눈에 오래 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 

우리는 미련 없이 다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오르막을 다 올라온 것일까. 

길을 따라 천천히 걷던 우리의 눈앞에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이내 우리를 집어삼켰다. 

아마 우리가 위에서 본 구름의 위치를 지나가고 있는 듯했다. 

가까운 주변의 모습들 만이 겨우 보일 뿐 

무엇이 그리도 부끄러운지 모두들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모습들도 나에겐 너무 사랑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는 경험.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배낭여행을 가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이었다.

- '보이진 않지만 걷다 보면 어딘가 나오겠지!'



오늘의 목적지는 트리아카스텔라의 호텔식 알베르게였다. 

꽤 크고 널찍했던 알베르게의 로비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들어간 방에는 

파리의 '파'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쾌적했다. 

기쁜 마음으로 베드에 시트를 끼우고 샤워를 마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드디어 비상식량을 꺼낼 때가 된 것이다. 

배낭 한편에 고이 넣어둔 컵라면과 봉지라면 하나를 손에 들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아마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내 발걸음에서조차 잔뜩 신이 났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 라면 두 개씩을 해치우고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낮잠을 청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저녁시간이 되자, 

홀로 마을의 성당으로 향했다. 

이미 미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숨을 죽인 채 뒤쪽 의자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미사가 끝날 무렵 동원이에게 문자를 남겼다.

- '나 이제 미사 끝나고 알베르게로 가고 있어. 저녁 먹으러 나갈 준비 하고 있어.'

- '준비했어. 조금 전에 알베르게에 독일 가족이 들어왔어.'


새로운 만남에 들뜬 마음을 가득 안고 알베르게에 들어오니 

독일 가족이 짐을 풀고 있었다. 

부모님과 첫째인 아들, 둘째인 딸과 함께

까미노를 걸으러 온 가족은 사랑이 넘쳐 보였다. 

어린 둘째 딸에게 인사를 하자 수줍은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웃음을 짓더니 

이내 아버지의 등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에 부모님과 우리는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저녁을 먹기 위해 우선 간단하게 인사만 나눈 채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도 식당에서 필그림 메뉴를 주문하여 파스타와 스테이크

와인과 후식까지 든든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알베르게로 향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온 우리는 짐 정리를 마치고 

쉬고 있던 독일 가족과 조금의 대화를 더 나누었다. 

특히 성인인 나도 이 길을 걷는 게 쉽지 않은데 

나이가 어렸던 아들과 딸이 까미노를 걷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기특해서 무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대하는 모습이 기분이 좋았는지 

어머니는 우리에게 폭풍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하셨다.


까미노를 걷는 게 두 번째라는 어머니는 

내일 우리에게 어디에서 잘 것인지 물어보셨다.


- "저희는 아마 내일 사리아에서 잘 것 같아요!"

- "그렇구나! 사리아도 좋지. 근데 거기 너무 복잡해서 

   조금만 더 가면 조용한 마을에 큰 수영장이 딸린 알베르게가 있어.

   우리는 내일 거기서 잘 꺼야. 애들이 너희와 놀고 싶다고 해서

   너희도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



불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가족이 되어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일. 

그 작고 소소한 행복은 어느새 까미노를 걷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순간들이 영원하길 바랬다.


그 무렵, 맑은 하늘에는 옅은 무지개가 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부엔 까미노 #2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