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희 Jan 03. 2024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2)

노력해도 안 되는 것.

 1987년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첩첩산중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자락, 문산리에서 꼭 이태째 목회 중일 때였다. 서울 친정은 대구 시가보다 가까우므로 부모님도 뵐 겸  새벽기도를 마치고 이른 아침을 먹고 서울로 출발하기로 했었다.

 밤새 태풍이 불어서 주위가 어수선했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나오는데 남편이 예배당 지붕의 스레트의 연결 못이 덜컥거린다고 했다. 계속 바람이 불면 빠질 수도 있다고 당장 망치를 들고 지붕으로 오를 기세였다. 뾰족 첨탑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지붕으로 나갈 수 있고 바람도 심하기에 나는 한사코 말렸다. 날이 밝고, 바람도 잦아들면 교회 인근에 사는  교인들과 함께 하자고.  그는 말없이 나와 함께 사택으로 들어왔고 나는 부엌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서둘러 준비했다. 그런데 순간 눈앞을 스치는 남편의 모습!  위험에 처한 것이었다. 놀라 질겁을 하며 남편을 불러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순식간에 예배당을 한 바퀴 돌았다. 환상은 적중했다. 첨탑 아래  우묵한 곳에 평탄작업을 위해 쌓아둔 연탄재 위에 남편이 추락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토록  말렸건만. 기어이 첨탑에 올라가 지붕 끝으로 가서 덜그럭거리는 못을 망치로 고정시키고 다시 첨탑 쪽으로 돌아오는데 바람이 휘이익 몰아치니 아찔~ 현기증이 일었단다. 발을 헛디디고 3층 이상의 높이에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연탄재의 완충작용에 큰 외상은 없었다. 하지만 요추 1,2번이 압박에 의해 짜부라지고 말았다. 그 길로 시가가 있는 대구의 동산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3개월, 귀가해서 6개월 동안을 몸통 깁스, 보조기 착용을 해야 했다. 여름을 지나는 시점이라서 몸통 깁스는 고통을 더했다.  주중은 대구에서 간호하고, 주말엔 강화를 오르내리며 그가 없는 교회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월 2만 원의 생활비를 받던 목회자의 사고가 알려지자 교단산하 개교회들을 통해 모금이 이뤄졌다. 그러나 시가의 어른들은 이 모금을 개인 치료비에 써서는 안 된다고 병원비 등을 내어 주셨고, 우린 교회로 돌아와서 그 모금된 돈으로 예배당 현관을 증축했다. 비나 눈이 오면 가림막이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고로 인해 1년을 보내고 단독목회 3년을 마치고 안수받을 즈음 서울에서 부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부산, 인천(강화)을 거쳐 다시 서울에서 사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하고  안정이 될 무렵, 자주 귀에 들리는 말이 있었다. "아이만 있으면 딱 좋은데, 아이가 있어야 하는데…" ' 그렇지 , 결혼한 지 4년이 지났는데 왜 아기가 내게 없을까? 작정기도를 해야겠다.' 아기를 달라고 40일 아침만 금식하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 교단 공과책 공동 집필도 의뢰받고 진행하고 있었고 , 어린이 선교단체의 한국지부의 교재편집도 맡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목사의 아내인데도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주셔서 남편과 같이, 혹은 따로 교회일을 하도록 해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가 없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공부도 하면 원하는 만큼 성적도 올렸고, 잠깐이지만 돈도 노력한 만큼 벌 수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던 나에게  왜 이런 문제가 있지?  집 안 그 누구도 불임은 없고 다복한데…  왜? '  더욱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였다.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3일, 7일… 부부사이의 불협화음이 모두 불임이 원인인 것 같아서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쩍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하다고 느껴져서 비싼 상담료를 지불하고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면담했다. '역시 신학은 모든 학문의 최고봉이다.'라는 확인뿐. 상담료가  아까울 뿐이었다. 다시금 '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다'라는 생각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심신이 약해져 감을 느끼고, ' 진정 문제가 있다면 … , 내 할 일을 못한다면, 이쯤에서 물러나 주는 것이 피차에게 좋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그는 독자도 아니고 3남 1녀 중 막내아들이었지만. 연로하신 어머님의 소망은 간절하셨다. 어느 날, 나는 혼자 집을 나와 강남 차산부인과를 찾았다. 검사를 받아 불임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불임의 뚜렷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 왜 혼자서 오셨어요?  부부가  함께 오셨어야지. 예약하고 다음엔 남편과 함께 오세요." 글쎄, 남편과 임신문제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본 적은 없는데 함께 오려고 할지, 어찌 생각할지 , 예측하기 어려웠다. 진료 예약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  남편에게 겨우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썩 내켜하진 않았다. 그래도 쉬는 월요일 병원에 동행했다. 의사는 남편도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검사를 받고 조금 기다리니 둘 다 들어와서 검사결과를 들으라고 했다. "건강한 정자수가 적고, 기형의 위험도가 높으므로, 건강한 정자를 골라서 투입하는 시험관 시술법이 가능한데,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성공확률은 높은 편도 아니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진 못했지만  남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도 않고, 언급은 더욱 피했다. 그렇지만 돌이나, 출산, 백일 등의 축하예배에 늘 주변인의 걱정을 피할 수 없었고,  어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데서 점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부목사를 마치고 남편의 고향 가까운 곳( 경남 삼천포)에서 담임목회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삿짐차를 타고 여섯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항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가히 홍인종이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과 강한 햇빛에 피부가 검붉게 익은 모양이었다.  순간 발걸음이 주춤하는 것을 느꼈지만 가슴속에서 찬송가가 솟구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님 따라서, 남편 따라서라면…'  진도견 사랑이도 먼 길, 장시간을 차를 타서 멀미가 난 것 같았지만 기꺼이 함께했다. 행정구역상 삼천포시에 속하면서 삼천포항에서 바라보이며 십여 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신수교회의 교인들은 보름 단위로 한 달 두 번씩 먼바다 조업을 나가는 큰 고깃배와 관광객을 태우는 유람선, 매일 인근에서 조업하는 작은 배를  운영하는 어부와 그 가족들이었다. 어업에 종사하므로 미신이 왕성해서 교회를 반대해서 다이너마이트로 예배당이 폭파되는 역사도 있었으나, 우리가 떠나올  무렵엔 거의가  예수를 믿었다. 그들은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조업을 하기 때문에 강하고 끈끈했다. 목회자와 교회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다. 무사귀항과 만선을 기도하며 남겨진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면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잘된 모든 것을 은혜로 알고, 최상의 어획물로 목회자를 섬기고, 귀항할 때마다 생선회와 매운탕의 요리를 교회 전체와 나누는 잔치를 벌이곤 했다. 인생이 먹고사는 것 만이라면 이곳이 최적이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업을 위해 일주일씩, 보름씩 먼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의 아내들과 제과제빵, 꽃꽂이, 하프 연주 등의 특활을 하며, 생명의 말씀사간, 키엔 카젠의 "믿음의 여인들"이란 책을 교재 삼아 묵상하고 나누는 성경공부도 했다.

그런데 처녀 적 독후감과는 다른  관점으로 흥미롭게 본 것이 임신, 출산에 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야곱의 아내 중 라헬,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모두가 임신을 위한 기도와 기다림이 있었고, 창조주의 주권과 섭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하나님 그분이 안된다고 하시면 안 되는구나! 기다리라면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하고!. 그래.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둘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면 되지.'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휴일이면 산행 좋아하는 반주하는 집사님 내외와 등산을 즐겼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눈빛이 달빛처럼 환한 지리산 산장에서 영하 삼십 도의 극한을 체험하기도 했다. 고기잡이 교인들은 고급 배드민턴채를 사주며  목회자 부부를  응원하기도 했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가족같이 끈끈한 교인들이었다. 임신에 대한 생각이 사그라들 즈음 대구에서 어머님이 오셨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우리 부부와 동갑내기인 큰 고깃배의 선주인 중직자 부부의 아들들이었다. 예배 중 그들 가족을 만나보신 어머님이 저녁 식사 후 TV 드라마를 보던 중 아들 얼굴 한번, 며느리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빤히 보시더니 " 의복을 갈아입듯 부부도 갈라서면 되는데… ".

청천벽력이었다. 아무리 자손을 바라는 간절함이라도, 시댁은 삼대째 기독교인 가정인 데다 작은아버지는 교단 부총회장(장로 총회장)으로 독실한 신자셨다. 사위와 아들이 목회하는 가정인데 어찌 이런 말씀을. 그날 남편은 대구의 맏형님께 병원 검사결과를 말하고 어머님의 일도 하소연했다. 얼마 후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고 대구의 시가에 갔더니 어머님과 셋째, 넷째 시작은 어머님들, 그러니까 시어른들이 앉아 계셨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더니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 네 형님한테 다 들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래?  네 말을 들어보자." "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니  저희끼리 사명 따라  더욱 열심히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죠. " "그래, 그렇다면 이 문제로 다신 얘기 않을 테니 더욱 잘하고 살아라."

억압에서 해방된 자유 함이랄까? 그 옛날 칠거지악이란 죄목으로 집에서 쫓겨난 여인들의 비참함을 떠올리며 산부인과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고, 감사했다.

작가의 이전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