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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희 Oct 24. 2023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1)

불임의 10년,

결혼 후, 해마다, 한글날이 들어있는 10월이  되면 싱숭생숭 생각이 많아지고 감성지수가 높이뛰기를 하는  조증(?)이  있는 것 같다. 그이가 떠나가고 안 계신 데도 어김없이 또 그렇다.  한글날이 아닌 삼 일 후에 그림을 그리다 만난 새 친구들과 기어코 속리산엘 가고야 말았다.  마치 소중한 그 무엇을 그곳에 놓고 와서 찾으러 가는 사람처럼~

물론 친구들의 계획은 청주 화방에 들러 필요한 화구를 직접 고르자는 것이었지만, 그런 친구들에게 속리산이 가까우니 들러서 산채정식도 먹고 보은 대추축제장도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화방에 들리자고 했다. 뭐 그리 나쁜 제안도 아니고, 눈빛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어선지 쾌히 속리산으로 향했다. 운전하는  동생뻘 친구가 더듬어 찾아간 속리산엔 아직 여름 끝자락의 기세가 강력했다.  우린 한참 지난 점심시간 탓에 허기져서 먼저  입구 식당에 들어가 산채정식을 주문했다. 더덕구이, 송이, 능이.. 표고등의 버섯 요리등  가을의 진한 향취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식사로 배가 부르니 산을 오르려는 목적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걸어야 소화가 되겠지. 무릎 수술 후 제일 긴 길을  걷는 것 같다.  친구들에게  먼저 운동이 되는 속도로 가라고 했다. 천천히 걸으며 풍경도 폰에 담고,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한사코 같이 가겠노라며  부분 부분 가을 옷을 입고 있는 숲을 그들도  폰에 고이 담았다. 속리산은 법주사 경내를 지나 댐이 있는 데까지 결코 가파르지가 않아서 걷기가 너무 좋았다. 스틱과 동행하며, 힘이 들면 멈춰서 심호흡을 할 때 그 산속 공기는 향기롭고 달았다.




K는 군복무로, D는  돈벌이로,  동기들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활 내내  D의 곁을 지키며 호감을 표하는 K를  거절하고   외면하다가, 졸업사은회를 마치고 흩어지는 길에서  신의 섭리로 드라마틱하게 마음이 열렸다.

" 내가 뭐라고… '아니다'라고 의중을 표시했는데도 4년 내내 한결같이 나만 바라봐 주다니…  도도하고 교만한 내가 도대체 사랑스러운 게 뭐라고…"  하는 측은지심과 졸업하면 꼼짝없이 아버지께서 점찍어두신  신앙 없는 부잣집 아들과의 혼사의 공포심의 발동이 가속도를 타게 했는지도 모른다. 임원활동도 같이하고  D의 알바현장인 선교센터의  일도 앞장서 도와주기도 했지만  이런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온전한 CC는 아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가운 반납하는 마당에서 K는 승리의 전사처럼  공개연애를 선언했다. 4년의 길다면 긴 시간 동안의  관심으로 졸업식날, 졸업축하 겸사겸사 대구, 서울에서 오신 양가 상견례가 이뤄졌고  가을쯤에 식을 올리기로 했다. 상견례 후, K는 부산에서, D는  서울에서 각자의 일을 하면서 편지로, 전화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일주일 두 번 K가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상경할 때가  금쪽같은  만남의 시간이었다. "얼굴도 못 본 체 결혼하던 시대에 비하면 얼마나  복된 건가.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한 케이스가 아니지만 이제부터 사랑을 시작하는 거야, 누구는 사랑은 만들어가는 거라고도 했다잖아" D는  극한 긍정에너지로 자신만만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비전이 약하면 여자가 불행하다는 둥, 여자가 신학을 하면 목회자 남편이 힘들다는 둥. 모두 손바닥으로 밀어 반사시켜 버렸다.

그 해 가을 한글날 이틀 후,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K는 30세, D는 29세로 당시의 적령기로는  딱 서너 살 늦은 나이였다.

D는 일하던 선교센터의 배려로 드물던 불광동 수양관 야외식장에서  관현악기의 연주 속에서  예식을 올릴 수 있었으나  어차피 목회자 남편을 따라가야 하는 배우자이니 시종을 시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사역지인 부산, 처가와  친구들이 있는 서울, 그 중간의  시가가 있는 대구에서 예식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자연히 신부 측 하객은 적었다. 서울대 앞에서 아침 7시 출발이었다. 서울 각지, D의 사역지였던 인천 등지에서 새벽 출발이었으니… D는 전날 도착해서  예식 준비를 했다.


결혼식 날은 청명했고, 서울, 대구, 부산 각지에서 축하하러 와주신 하객들로  예배당은 꽉 찼다. 살짝 차이나형 목의 순백 드레스는 한 번도 입히지 않은 새것이어서  특혜였고,  한 잎 한 잎 , 백장미잎을 따서 엮은 부케도  흔히 보기 어려운 최상의 것이어서  신부와 결혼식장을 더욱 성스럽고 귀하게 꾸며줬다. 축복기도, 축사, 주례설교, 축가를 해 주신 분들의 가정과 부부애, 인품등이 모두 극히 존경받는 분들의 진심이라서 마음에 새겨졌고, 감동이었고, 감사했다.

예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캐리어를 챙기는데 K가 내민 것은 예고했던 제주도 항공권이 아닌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행 승차권이었다.  주일까지 교회 복귀하려면 시간이 안된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다. 여행가방 준비물들 중에는  빛 볼 일이 없는 것들도 많아졌을 뿐. 대전 터미널에 도착하니 어두워지고, 거리의 네온이  피곤한 신혼을 반겼다. 여관을 정하고 나와서  설렁탕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숙소에 들어가 씻고 나니  K는 신혼 첫날저녁 시작할 것이 있다며 성경책을 들고 탁자에 앉았다. 둘은 최초 가정예배를 드렸다. 진심으로.

 다음날, 속리산으로 간다고 앞장선 K를 따라서 여관 밖으로 나가니, 뜻밖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K의 친구들 커플이었다. 한쌍은 이미 결혼한 친구! 한쌍은  결혼을 약속한  미래의 신혼부부!  듣기만 한 초면의 친구들이었다. 생소했지만  속리산에서  사진도 찍고, 결혼한 친구 내외가 준비한 도시락도 먹고  하면서  친해졌다. 저녁때가 되어서 친구의 약혼녀가 인천에서 들어가는 섬이 집인데 바래다 줄 겸 서울 처가에 갔다가 오면서 대구 시가에 가서  인사하고 부산 목회지 신혼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 으응? 이게 아닌데?  시가에선 아시고 계시는가? 서울 집엔 연락도 안 했는데…?"  피곤하고 지쳐서 밤늦게 처가에 들어갔다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신혼부부를  맞기에 당황한 어른들께  교회복귀 때문에 일정이 이렇다고 둘러댔다. 하룻밤 재우고, 급히 D의 일가 여자 어른들이 모여  신랑신부 접대를 했다. 받은 것도 없이 부랴부랴 재촉한 이바지 음식을 챙겨서 답례로 갖다 드리라 했다. 다시 서울에서 대구로 오니 저녁이 다되었다. 대구 친가에서는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아들의 단독실수인 줄 알 턱이 없는 어머니는 처가에 먼저 갔다 왔다고 노여우셔서  절도 받지 않고 음식도 잡수지 않으시니  그날 모두 저녁을 굶었다. K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럴 수가! 친정 부모님을 욕되게 하다니… D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시는 어려워서  결혼식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신혼여행도 생략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목회하는 사람이 이런 것을 트집 잡겠냐 했다.  그 후 1년 후 결혼기념일은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에서 맞이했다. 단독 목회 3년을 이수해야 목사안수를 받게 되므로 강화 마니산 자락 문산리에서 목회를 했다. 십리를 걸어 나가면  화도면 면소재지에 다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먹으면서 결혼 1년 차라고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다시 십리, 비포장길을 걸어 들어왔다. 어둑해진 길가 풀숲에서 기르던 고양이 나비가 "냐옹"반기며  튀어나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결혼기념일 이벤트였다.



그 후, 아이들이 자라서,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둘째가 고3인 부모 결혼 30주년 기념일에  장미꽃 흩뿌린 낭만 가득한 촛불길과 케이크, 그리고 가족사진으로 축하를 받기까지 부부에게 결혼기념일에 어떤 이벤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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