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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희 Jul 10. 2023

익모초(益母草)

오랜만에 아파트 근처 수변을 산책한다.

그 새 산책로변에 꽃과 풀들이 수북이 자랐다. 돌나물, 쑥, 토끼풀, 망초. 이름 모를 야생초 등등. 어김없이, 여전히 돋아 자라는 이들의 성실함에 믿음이 가고 반가와서 부드러운 눈인사를 보낸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간절히 찾는 풀은 따로 있다. 내게는 은인 같은 풀이다.


‘어머니의 풀’이라 이름 붙여진 아시아의 산과 들에 자라는 ‘익모초(益母草)’는 여성의 병을 낫게 하고 혈액순환을 돕고 눈을 밝게 하는, 한약재로 쓰이는 꿀풀과 식물이다. 결혼한 지 십 년 동안 불임인 막내아들네는 노모님의 걱정거리였다. 해마다 6월생 막내아들 생일 전후로 막내네 집에 오셔서 한 달쯤 머물다 서울 둘째네로 가셨다가 역시 한 달쯤 지내시다 대구 큰아들네로 귀가하시는 어머니셨다.


시어머님은 농촌에서 목회하는 막내 집에 오실 때마다 마실 나가시면 보이는 족족 익모초를 꺾어 오곤 하셨다. 달리 돈을 써서 해결할 처지(시험관 시술)도 못 되어서 더 애절한 맘으로 ‘단오절 전에 꺾어야 약효가 좋다’시며 꺾어 말리셨다. 단오가 지나선 가시가 생긴 익모초에 손이 긁히셔서 따갑고 쓰려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말린 익모초를 한 아름 들통에 넣고 달여서 마시라고 건네주셨다.


송아지 껍데기를 고아 우묵을 만들어 주시던 교우들. 그 염원들이 모아져서 은혜를 입었다. 뭐하나 나무랄 데 없는 두 아들을 출산했다. 구순에 가까이 돌아가시기까지 이 자손들이 낙이셨던 어머님은 막내며느리의 손금을 들여다보며 “아직도 아들이 하나 더 있는데” 하시며 아쉬워하실 정도로 자손 욕심이 많으셨다. 몸무게 38kg. 허리 22.5인치였던 막내며느리를 상견하시며 ‘아이가 아이를 낳아 기르겠냐’고 안타까워하셨던 어머님.


‘수채에 뜨거운 물 붓지 마라. 하찮은 미생물이라도 생명이니-’

’말 못하는 짐승(개와 고양이) 밥 굶기지 마라’


국문은 떼지 못했으나 인생의 도리를 다하셨던 어머님. 형님네들 입방아‧고자질을 막아서셔서 먼저 친히 꾸짖으시고, 과한 리액션을 보이셔서 평화를 주셨던 어머님. 어려운 시절, 형님들(첫째, 둘째 며느리)은 생일은 챙겨 주시지 못했다가 시절이 조금 나아져 결혼한 막내며느리 생일에는 ‘어머니, 선물 주세요’ 라고 떼를 쓰자 “그래. 가자 자장면 사주마” 시며 처음 자신의 용돈을 들여 외식을 시켜주셨던 어머님.


일단 막내 집에 오시면 그날부터 어머님의 나라가 펼쳐졌다. 어렵고 서먹한 맏며느리와는 달리 손녀딸 같은 막내며느리가 편하셨는지, 어머님 시집살이와는 전혀 다른 주방 구조, 세간살이, 어린 손자들. 성직자 막내아들. 어머님의 존재는 대비마마 이상이셨다. 장난감같이 아기자기한 세간살이를 틈만 나면 들어가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늘어놓아 보는 어머님. 막내며느리는 대구 큰댁으로 가실 때까지 ‘남편도 손자들도 다 어머님 것입니다’ 라는 맘으로 대했다. 나중 다시 내 취향대로 재정비하더라도, 계실 동안만은 마음대로 해 보시도록 나물, 국 등 음식 간도 꼭 어머님께 시식권을 드리고 맞췄다. 소화 불량, 변비 등으로 고생하시기에 소화시키기 좋은 음식 등을 준비해 식단을 챙겼고, 가능한 밖으로 모시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 드리고 함께 했다.


아들 옆자리에 앉으셔서 장단을 맞추며 찬송가를 부르시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늦게 얻은 손자들의 초등학교 운동회, 발표회, 그리고 여름휴가 등 함께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불임 10년간의 시집살이는 간 곳 없고 손자를 본 어머님은 아들에게 며느리를 도와주라고도 하셨다. 가부장의 황제. 경상도 남자인 남편보다 인간적인 정이 물씬나는 어머니가 참 좋았다.




어머니 여든 여섯 여름이었다. 여전히 막내 아들 생일 전에 충남 논산으로 오셨다. 우연히 병증이 위중하심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병원 등 밖에서 임종을 맞으신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셨다.


“병원 말고 집에서 숨거두게 해달라. 이 곳 너희 집에서 천국 가면 싶다.”


갑작스런 진단을 받고 두렵고 당황스런 순간에도 “이 금 가락지, 금 팔찌, 금 목걸이 등은 네 손위 동서들이 해 준 것이니까 돌려주고, 돈은 안돼도 너는 내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적 부터 물려주신 은가락지를 주마. 통장의 잔고는 아들들이 의논해서 나누고.” 하시면서 은가락지 한 쌍을 전해 주셨다. 어머님 유산의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을 받아서 감사하기 그기 없었고 애달팠다. 그 의미와 가치가 나에겐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잘 닦아서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주인공을 기다리며. 은이라서 소장의 기간이 더욱 길다는 것도 내겐 좋다.


임종 전 마지막 한 달 병원에 계실 때 사남매가 번을 돌며 간병할 때 였다. 목회하느라 시간내기 어렵던 막내네가 하룻밤 모시고 있는데도, 칸막이 안에서 곁의 환자에게 “그래도 배운 애가 나아요” 하며 자랑 겸 막내며느리를 소개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죄송하고 민망했던지. 가슴이 찡했다. 행여 아들 기 꺾일까 노심초사하셨던 분인데.


이제는 꺾을 필요 없어서 같은 자리에서 몇 년째 만나는 수변 익모초 앞에서 한참을 어머님 생각을 한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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