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20대의 기록

가장 솔직하게 나를 마주하는 순간

by 화운

나는 지금 강릉의 안목해변, 파도가 닿을락 말락 하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 앉아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바다는 북적이는 서울 한복판의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보다 웅장하고 강렬한 파도소리로 내게 말을 건다. 세차게 위협하듯 밀려오다가 해변가에 부딪혀 잔잔히 스며들며 사라지는 파도를 보며 문득 내 마지막 20대를 기록해보기로 하였다. 더 나아가 기록하지 못한 희미해져 가는 10대를 더듬어보며 아직 살아보지 못한 30대와 40대, 그 이상의 미래의 내 모습도 기록하기로 다짐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가 처음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무엇인지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강렬하게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면, 어릴 적 우연히 보았던 가족앨범 속 마이크를 잡고 가족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부리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지금의 차분해지고 생각이 많은 내 모습과는 너무나도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진 속의 아이는 가수의 콘서트 무대보다 더욱더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둘러싸인 마냥 즐거워하고 있다. 나는 이 첫 기억이 정말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 중에서 가장 어떤 조건과 걱정 없는 행복한 웃음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 광활하고 미지의 세계 같은 바다 같은 세상에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 이 바다를 행복하게 마주하며 태어난 것 같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공부를 많이 못했다고 한다. 받아쓰기도 반타작으로 집에 들고 오기 일쑤였고, 게임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원에 가는 것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학원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좋았던 것일 뿐, 공부가 좋아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어느 날 노을도 희미하게 불빛이 꺼져가는 무렵, 나는 집에서 단밤보다 달콤한 낮잠을 자다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동안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직도 왜 그때의 내가 멍하니 누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알 수 없는 나의 시선은 내 일생의 순간을 틀어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단순히 그 공부하는 모습만을 보아서가 아니었다. 공부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았던 누나가 매번 방학숙제를 대신해주고, 때로는 일기도 대신 써주는 모습을 철없이 자주 봐왔던 내가 이 순간에 내 머리를 세차게 밀고 들어와 마음까지 흔들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2등까지 해봤을 정도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작은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재밌는 추억들도 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도시에서 살고 싶고, 더 다양한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꿈과 열망으로, 마음 맞던 친구들과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던 추억들이 더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때의 학원 선생님들도, 학교 담임선생님들도 식지 않은 온기로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 곁에 나를 이끌어주고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이러한 어른에게서 받은 무조건적인 따뜻함과 멘토로부터의 격려는 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이때의 온기는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 같다.


내 소소한 꿈이 처음으로 내 힘으로 실현했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작은 시골에서, 조금은 더 큰 도시, 순천으로 고등학교를 입학한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만큼 좋은 학교라고 불리던 고등학교로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에서의 삶을 맛보게 되었다. 물론, 고등학교 기숙사에 살았고, 여전히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순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놀거나 하진 않았지만, 매일 함께 지내던 가족들의 곁을 떠나 타지에서 삶의 조각들을 나 혼자라는 것에 맞춰가기 시작한 작은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시내버스를 타면서 반대 방향으로 타서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종착지에서 방황한 적도 있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반에서 나 빼고 모두 순천에 사는 친구들이라서 겁을 먹고 먼저 말을 못 걸기도 했다. 처음으로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준 친구도 있었는데, 그때도 어버버 하면서 반가움과 고마움을 숨긴 채 도망친 적도 있었다. 원래 나는 꽤나 내향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1학년 때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지만, 먼저 나서서 말을 걸거나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2학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기숙사의 사생장이었던 형이 나를 좋게 보고 다음의 사생장으로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었다. 사생장이었던 형도 너무 좋았고, 사감 선생님도 존경했기 때문에 막연히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사생장이 시작이 되어, 큰 목소리로 저녁 점호를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했을 때, 많이 힘들었다. 내성적이던 내가 고등학교 회장처럼 사람들을 큰소리로 불러 모은다는 건 해본 적 없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처음과 시작만이 두렵고 어렵지, 그다음은 어려움이 많이 없어진다는 말처럼, 점점 적응해 나아갔다. 단순히 적응해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빠르게 적응하고 사생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성격이 외향적으로 점점 바뀌어 갔다. 나중에 한 친구는 내게 사생장이 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친구들도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한다는 작은 두려움이 작은 도전의 설렘으로 바뀌었다. 내 두 번째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능을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받지 못하고, 재수를 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의 내 나이, 19살은 꽤 아픈 1년이었다.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의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더 멋진 20대의 삶을 시작하고 싶었기에, 매일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꿈을 상상하며 보냈던 19살이었다. 지금도 고향의 내 방 한편의 타임머신 같은 상자에는 19살, 1년 내내 내 꿈에 대한 열망과 소망이 가득 적힌 말들이 빼곡히 적힌 다이어리가 보관되어 있다. 가끔 내 삶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고장 난 나침반처럼 잃어간다고 느껴질 때면 이 다이어리를 열어본다. 이때의 나는 오로지 서울권의 대학 입학이라는 큰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며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꿈에만 몰두했었다. 지금의 나는 여러 가지 들을 신경 써야 하기에 많은 상황들이 달라져 버렸지만, 이 다이어리를 볼 때면 이러한 내 상황들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위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열심히 달려온 나를 동경하면서 돌아보게 된다.

재수를 시작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누나와 단둘이서 자취를 시작했다. 내 인생의 첫 20대의 시작은, 내 첫 자취생활은 내가 꿈꿔왔던 대학생이 아닌, 노량진의 학원에서의 하루가 전부였던 재수생이었다. 이때 당시의 나는 정말 아팠다. 나만 아팠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재수학원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가고, 취준생이었던 누나에게도 많은 돈이 들어가기에 부모님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힘들어하는 나와 누나가 걱정이 되던 부모님이 어느 날은 서울로 올라오셔서 맛있는 밥도 사주시고 좋은 옷도 사주신 적이 있다. 이 날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얘기하신 적이 없던 집안의 경제에 대해 얘기를 하셨었다. 가족들과 가볍게 술 한잔을 기울이고 나서 들었던 아버지의 솔직한 얘기는,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한 번도 얘기하신 적이 었었던 돈 얘기이기도 했고, 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엔 나의 재수에 들어가는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살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없는 생각은 언제까지나 내가 보고 듣지 못했던, 마주하지 못했던 현실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나는 굳은살이 박여 바위 투성이 같은 아버지의 굳건한 손바닥을 보며 실패하지 않기로 한 번 더 다짐했다.

재수생의 시절 자존감도 많이 낮았었다. 나름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해있었지만, 재수학원의 친구들은 압도적으로 성적이 늘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하나라도 더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해오면 90점만 넘어도 잘하고 있다고 나를 위로했었지만, 친구들은 원래 다 맞는 성적에 하나를 틀린 거에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시절의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 밖을 나서서 7시에 제일 먼저 학원에 도착해 공부를 시작했었다.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였고, 하루도 빠짐없이 1시간씩 주변 공원에서 줄넘기와 함께 운동을 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잠을 잘 못 자는 날도 적지 않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몸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낮은 자존감을 억지로 끌어올리면서 매일 밤 기계처럼 열심히 하며 보냈던 1년, 내 첫 20대, 스무 살은 꽤나 아팠다. 그래도 아픈 만큼 성적이 올라 서울권의 대학을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목표했던 곳과 다른 대학으로 입학을 하게 되는 애매한 성적이긴 하였으나, 더 나아진 나 자신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 20대는 그렇게 정신없이 밝은 하늘보다는 어두운 새벽과 밤을 더 많이 보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앞으로의 내 삶의 보이지 않는 등대, 보물상자와 같은 스무 살이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가서 힘든 일과 생활을 많이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보다 더 힘들었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도 취업준비를 할 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장 아팠지만 이겨내었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1년 동안 기계처럼 꾸준히 열심히 할 수 있었는지, 대단하면서도 앞으로도 똑같이 할 수 있을지와 같은 생각들이 든다. 김난도 교수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을 좋아하지 않지만, 내 스무 살은 이 책 제목처럼 '아팠기에 덜 아파하는 법'으로 내 삶에 무기를 쥐어주었다.


대학생활은 꽤 재미있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고 있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활동을 해본 경험들은 하얗고 단조롭던 내 삶의 캔버스에 다채로운 물감들을 뿌렸다. 그래서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다채로운 물감들을 나라는 캔버스에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나에게 맞는 그림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들을 자주 고민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반면에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별개로 생각해보거나 만난 적 없는 부류의 개성적이고 독특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천 가지의 물감들로 그려져 가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서, 나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잃지 않고, 놓치지 않기 위해 가장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약 2년이라는 군대에 갔다 온다는 것을 매우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보곤 한다. 100% 이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나는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라면 헛되이 2년을 보내지 않고 잘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의 나는 내 진로에 대해 많은 회의감과 고민을 했다. 원래의 나는 선생님을 꿈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수를 하고 입학을 고려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현실을 따지게 되면서 원하지 않았던,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경영학과로 들어가게 되면서, 방황을 하기 시작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많은 간부들과 상담을 하였고, 멘토링도 했었다. 다양한 선임과 동기, 후임들과 근무 서면서 미래에 대해 얘기도 해보았고, 약 2년 동안 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군대라는 문화 특성상 남는 시간에 할 것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의미 있게 보내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와 독서, 의미 있는 방황이었다. 내 길을 찾아가기 위해 억지로 읽지 않던 분야의 책도 읽어보기도 했다. 80권 즈음에 다다를 정도로 독서를 하다가 광고에 대한 책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이때 나는 광고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호기심이 강렬하게 이끌렸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광고와 관련된 책들도 더 찾아서 읽어보기도 하고 광고기획 관련 공모전도 여러 번 도전했다. 그 뒤로는 광고홍보학과도 복수 전공하고 중앙 광고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회장까지도 해보았다. 그렇게 재미있는 동아리 활동까지 하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취업준비에 뛰어들게 되다가 우연한 기회로 인턴십에 지원하여 첫 회사에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인턴십이 끝나고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면서 본격적인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남들보다는 덜 힘들게 취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케터가 되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제품 기획과 관리 등 다양한 일들을 해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주 고민도 해보면서, 내가 과연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와 목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일을 했다. 이러나저러나 일은 재미있고 마음에 들지만, 잦은 야근과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동반하였기에 아이러니함은 늘 함께 하였다. 그러다가 의욕과 현실이 같이 나아가지 못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이 겹치면서 내 몸과 마음은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번아웃이 된 나는 약 2년이 되지 못한 경력을 주머니 속에 주섬주섬 챙겨 퇴사를 하였다. 주변에서는 나를 좋게 봐주는 분들은 말리기도 하였고, 이해하는 분들은 가더라도 2년을 다 채우고 가라는 현실적인 조언들도 많이 해주었다.

정말 많이 힘들었기에 이 모든 것들을 뿌리치고, 나를 위해 긴 휴식 기간을 가지면서 잃어가던 나 자신을 회복해보기로 하였다. 약 6개월간 일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해보고 도전해보면서 꽤 괜찮은 휴식 기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삼촌 회사에 들어가게 되어 일을 6개월 간 하였다. 사업가 마인드가 강했던 대표이사인 삼촌의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삼촌으로부터 옥보다도 귀한 조언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으로 보면서 내 길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고민을 하면서 솔직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광고대행사로서의 일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삼촌 회사를 관두고 현재,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던 배우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기도 하고, 반면에 생각지도 못한 일들도 하면서 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끔은 몰려오는 일들에 너무 힘들어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치기도 하고 홀로 타지 살이 10년 차에 적지 않은 외로움에도 이겨내지 못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의 나를 좋아해 보려고 한다. 일이 많고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고, 나 자신이 여러 방면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곁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의 곁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도 한 번 더 실감하고 있다. 힘들더라도 서로 돕고 할 수 있다는 것과, 고통스럽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과 활기찬 에너지로 대한다면 그 에너지가 나에게,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늘 하고 싶은 게 많은 나는, 그래서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될지도 몰라서 마음만 앞서고 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것은 꿈과 목표가 있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의해야 할 것은 이를 위해, 내 행복을 위해 늘 나태하지 않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카페를 찾고 그 카페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며 향긋한 커피와 함께 감미로운 책을 읽는 어느 하루의 따스한 순간도, 결국 집 밖을 부지런히 나서야 맞이할 수 있는 행복이다. 이 처럼, 나는 소소한 행복이라도 멀리서만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주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가까이서 찾아보려고 한다. 늘 지나가는 일상의 골목길도, 어느 공원가 거리도 돌이켜보면 저마다의 행복과 감동, 여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 보내다 보니 벌써 어느새 내 나이 29, 지금 2021년 12월까지 와버렸다. 너무 많은 일들과 추억이 있었던 내 20대가 벌써 이렇게 종착점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과 마음속을 교차하며 지나간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20대의 마지막 기록도 더 많은 것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 쓰지 못한 20대의 기록을 끝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매일의, 매 순간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듯이, 나는 매일의 조금씩 다른 나를 마주할 것이고 그 나는 때때로 다른 20대의 나를 추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중에 30대로 접어들고 나서도 종종 20대를 되돌아보면서 30대로서의 돌아본 20대를 회고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20대가 아닌 30대로서 조금은 새롭게 시작해보게 될 나는 더욱더 나은 삶을 살며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힘든 일들이 몰려와 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 아파해야 하는 내가 몰는 순간들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내 행복을 위해 나아갈 테니까, 더욱더 행복해질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니까, 의문과 걱정보다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 보려 한다.


내 20대의 마지막 기록을 마치며,

내 30대의 새로운 기록을 기다리며,

현재의 나를 좀 더 솔직하게 마주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