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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Aug 06. 2020

순도 100%의 깨끗한 러닝타임


대부분의 슬럼프는 나의 작업시간이 잘 편집된 영화이길 바라는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메모 한 장을 써도 그 시간이 낭비되지를 않기를 바란다. 내가 한 모든 낙서와 그림들이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 훗날 작품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란다. 천재 작가들도 할 수 없었던 완벽을 바라는, 참 어이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오랜 강박이 되고 나자, 이유없이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에세이를 쓰고 난 뒤에는 자기 전에 마구 갈겨쓰던 일기 마저 두려워서 쓰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아무래도 '쓸모없을까봐' 가 가장 크다. 두 번째는 쓸모없을 수도 있는데 '굳이' 작업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였다. 그래서 늘 시도하다가 만 그래픽노블과 퇴고가 필요한 일기같은 에세이, 그리다 만 그림들이 방치된 옷장처럼 쌓여갔던 것이다.


창작에 앞서서 늘 머뭇거리는 이유는 내가 한 것이 잘 기획된 컨텐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고민하듯 늘 창작 의도와 제목을 먼저 정할까, 글이던 그림이던 일단 떠오르는 걸 해야하나, 우왕좌왕한다. 머릿 속으로 '수학 공부 해야지.' 라고 다짐해놓고 정작 노트를 펴고나선 예쁜 글씨로 쓰고있는 행위에 심취해 있는 학창시절의 내 태도와 다를 것이 없다.



▶ 작업대에 앉으면 대출광고 메모지에 아무말이나 떠오르는대로 다 적는다. 쓸모없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함이다.



폴더에 있는 파일만 봐도 내가 작업에 쏟은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단편만화 10편, 에세이 25편, 일러스트는 10점도 안 된다. 이것이 1년 안에 해낸 것들이라면 나의 작업시간은 알토란 처럼 꽉 찬 것이 되겠지만, 12년 가까운 시간동안 해놓은 결과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쓸모 없을 수도 있는 것을, 쓸모 없다면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작업 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하면서도 괴롭고, 보기에도 꼴사나운 태도로 작업에 임했을 확률이 크다.  


앞으로 작업 시간의 러닝타임을 짜집기 하지 말자. 1시간을 해놓고 10시간을 쓴 것 처럼 생각하지 말고, 이력에 남기는 시간과 실제로 수행한 물리적 시간을 착각하지 말자. 내 인생에서 순전히 작업한 시간만을 편집했을 때, 인생의 3/1쯤은 그리고 썼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순도 100%의 깨끗한 러닝타임이 그러려면 나는 일단 작업대에 앉아있어야 하고, 쓸모없는 것이라도 그리고 쓰고 있어야 했다.




        



                                                                                                    2020. 08. 06. 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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