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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Aug 08. 2020

바나나 껍질맛 소주 한 잔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예쁘구나. 


그렇게 말하면 론은 배시시 웃었다. 꽃잎이 펴지듯 천천히 웃는 표정이 좋았다. 찡그리는 콧볼에 못 보던 큐빅이 반짝이길래 '혹시 코 뚫었니?' 물어보니까 또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론은 가끔씩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해놓고 싱겁게 배시시 웃고 만다.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불면증 때문에 술을 끊었어요."


그 애를 힘들게 하는 일은 다시 만났을 때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불행의 복선은 좀처럼 사라지는 법이 없으니까.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징그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불친절하지만 음식은 정성 들여 만들어주는 채식 식당에서 서로의 복선이 현재 어떤 식으로 자라났는지 이야기했다. 그 애는 잠이 오지 않아서 그대로 밤을 새운 채 회사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고, 괴로워서 술을 먹으면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제2의 자아가 친구에게 문자도 보내고 가족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요. 언니. 저도 그 애가 누군지 궁금해요.




올해의 내 나이와 해야 하는 역할과  달치 월급과 써버린 카드값과 애인의 유무와 꿈의 실현 여부 같은 . 그런 것으로 인생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우린 알고 있다. 점점 추해지는 외모와 불어난 체중과 개털 같은 탈색모와 누런 이빨 같은 것들이 실존하는 나이지만 그것만으로 판단되길 원치 않으며, 졸업했던 학교와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 알량하게 가지고 있는 독립출판물  권이 그래도  보이길 바란다는 것도. 그러나 배시시 웃는 론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바나나 껍질을 까면 드러나는 베이지색 속살처럼, 부드럽고 무른 존재이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복선들로 껍질이 너무 두껍고 단단하게 굳어버려 속살이 새까맣고 고약할까  두려웠다. 혹은  안에 나란 존재가 있긴  건지 감각이 사라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겉껍질을  보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작가라는 미명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해방이 되면, 숨 막히게 나를 감싸고 있는 그것들을 다 까버리고 나면 그때의 나는 뭐가 하고 싶을까.




나는 여행이 가고 싶을 것 같아. 아무 데나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싶어. 너는? 론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냥 혼자 살고 싶어요.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살다 가고 싶어요. 그렇구나. 껍질을 다 까고 난 우리는 여행이 가고 싶었고 혼자 힘으로 살다가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게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구나. 참 평범하고 슬픈 꿈이었다.

 

안주로 꺼내놓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물고 소주를 마셨다. 

달고 쓰고 텁텁하지만 삼킬만 했다. 우리가 살아낸 하루의 끝 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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