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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껍질맛 소주 한 잔

by 그리는MK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예쁘구나.


그렇게 말하면 론은 배시시 웃었다. 꽃잎이 펴지듯 천천히 웃는 표정이 좋았다. 찡그리는 콧볼에 못 보던 큐빅이 반짝이길래 '혹시 코 뚫었니?' 물어보니까 또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론은 가끔씩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해놓고 싱겁게 배시시 웃고 만다.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불면증 때문에 술을 끊었어요."


그 애를 힘들게 하는 일은 다시 만났을 때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불행의 복선은 좀처럼 사라지는 법이 없으니까.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징그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불친절하지만 음식은 정성 들여 만들어주는 채식 식당에서 서로의 복선이 현재 어떤 식으로 자라났는지 이야기했다. 그 애는 잠이 오지 않아서 그대로 밤을 새운 채 회사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고, 괴로워서 술을 먹으면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제2의 자아가 친구에게 문자도 보내고 가족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요. 언니. 저도 그 애가 누군지 궁금해요.




올해의 내 나이와 해야 하는 역할과 한 달치 월급과 써버린 카드값과 애인의 유무와 꿈의 실현 여부 같은 것. 그런 것으로 인생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점점 추해지는 외모와 불어난 체중과 개털 같은 탈색모와 누런 이빨 같은 것들이 실존하는 나이지만 그것만으로 판단되길 원치 않으며, 졸업했던 학교와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 알량하게 가지고 있는 독립출판물 몇 권이 그래도 나고 보이길 바란다는 것도. 그러나 배시시 웃는 론과 함께 있으면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바나나 껍질을 까면 드러나는 베이지색 속살처럼, 부드럽고 무른 존재이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복선들로 껍질이 너무 두껍고 단단하게 굳어버려 속살이 새까맣고 고약할까 봐 두려웠다. 혹은 그 안에 나란 존재가 있긴 한 건지 감각이 사라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겉껍질을 까 보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작가라는 미명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해방이 되면, 숨 막히게 나를 감싸고 있는 그것들을 다 까버리고 나면 그때의 나는 뭐가 하고 싶을까.




나는 여행이 가고 싶을 것 같아. 아무 데나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싶어. 너는? 론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냥 혼자 살고 싶어요.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살다 가고 싶어요. 그렇구나. 껍질을 다 까고 난 우리는 여행이 가고 싶었고 혼자 힘으로 살다가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게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구나. 참 평범하고 슬픈 꿈이었다.

안주로 꺼내놓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물고 소주를 마셨다.

달고 쓰고 텁텁하지만 삼킬만 했다. 우리가 살아낸 하루의 끝 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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