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디자이너의 자세
고로 초연결, 초지능 시대.
포스트-바벨탑에 끝이란 존재할까? 과학 기술은 오늘과 내일의 차이가 소름 돋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발전의 선상에서 디자이너의 역할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디자이너가 '아티스트'로서의 고집을 고수할 수 있었다면, 현시대의 디자이너는 '정보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국내 IT기업 인공지능 플랫폼 관련 부서의 B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내가 속한 부서의 역할은 우리 브랜드 체계를 관리하고, 정립하고, 유지/보수까지도 겸한다. (실상은 유지/보수가 8할이다)
인공지능 플랫폼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플랫폼 브랜딩과 기술 브랜딩의 중요성 또한 점차 커지고 있다.
플랫폼과 기술 브랜딩이란 뭘까?
STARBUCKS는 [커피]를 팔지만 소비자는 [문화]를 사고,
Apple은 [디바이스]를 팔지만 소비자는 Apple 사용자라는 [소속감]을 산다.
위의 두 사례는 유형의 생산품이 본질이고, 사용자가 그보다 큰 무언가를 소비하게 되는 케이스다.
그러나 기술/플랫폼 브랜드는 반대이다. [무언가 크고 보이지 않는, 잡히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그것을 사용자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게 유형의 매개체를 (스피커, 애플리케이션 등)을 만들어 배포한다. 그럼 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상태에서 그 답은 산산이 흩어져 허공에 떠다니고 있으며 그것을 정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이것이 플랫폼/기술 브랜딩의 목적지라고 생각한다.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Google이나 Amazon 같은 대표기업을 비롯, 이 목적지에 완벽히 다다른 기업은 없다.
왜?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등 기술집약적인 가치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겁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접근조차 어려운 존재를 어떻게 브랜딩 해나가야 하는 걸까?
'브랜딩'이라고 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무래도 '로고'나 'BI/CI'일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로고를 비롯한 태그라인, 기업 컬러, 서체 등이 그 기업의 얼굴이자 브랜딩 자체라며 중요한 것처럼 다루어졌다. 하지만 모바일이나 태블릿, 웹 화면에 사는 지금 시대에 '로고 디자인'은 더 이상 브랜드에 차별화를 주는 요소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UBER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 UBER 로고가 너무 좋아서 사용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로고는 '상징성'이라는 역할만 수행하면 그것이 황금 비율에 기반하여 디자인되었는지, 기하학적 조형인지, 어떤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제 인정해야 한다. 사용자들은 '이 서비스'와 '저 서비스'를 구분하는 장치로서 로고를 인지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약 어떤 로고를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83.3%의 확률로 직업이 디자이너일 것이다) 물론 의미 있는 시각 상징-즉 ‘이 시대의 러브마크(Lovemark)’ 도 있다. 예로 나는 Airbnb의 심벌을 사랑한다.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티셔츠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Leica의 브랜드 로고와는 다르게, 플랫폼/기술/서비스 브랜드 로고는 영속성을 가지기 어렵다. 슬픈 사실이다. 서비스는 몰락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 (Airbnb가 몰락하고 10년 뒤, 그 브랜드의 로고 셔츠는 가치가 있을까? / '심마니'라는 포털의 로고를 기억하는가?)
로고 디자인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BI/CI 디자인을 해온 나로서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다. 단지 IT분야에서 로고 디자인은 다양한 환경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느냐가 1순위 가치이다. 시인성과 직관성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외에 대단한 의미를 만들 필요는 없다. 의미는 차차 생각해도 괜찮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노오력을 조금 등분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에게 우리 플랫폼이 어떻게 인지되어야 하는지', '우리 기술의 매력을 어떻게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 '우리 브랜드의 핵심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고민이 더 도움 될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브랜드 네임 또한 '이해 가능한 수준'이고 '부르기 좋으면' 장땡이다.
제레마이어 가드너의 '린 브랜드(Lean Brand)'에서는 현시대의 로고의 입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로고는 일방적이다.
로고는 유효기간이 짧다.
로고는 일반적으로 매우 작게 사용된다. (웹 메인에서 150px x 30px)
무엇보다도 디자인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창출한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안으로, '브랜드 상징 요소'의 범위를 확장하여 생각하도록 권장한다.
구글 웹이 오프라인 상태가 되었을 때 등장하는 '공룡 게임'
이케아의 가구는 모두 스스로 조립해야 하는 것
에어비앤비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슬로건
오레오 과자를 우유에 적셔 먹는 장면
스타벅스에서 컵에 이름을 써주는 행위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브랜드의 이러한 특성은 서로 다른 형태이지만 모두 중요한 상징 요소이다.
기술과 플랫폼 브랜딩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거나 떠올릴 수 있는 상징 요소를 만드는 것은 단단한 브랜드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T브랜드를 예로 들어보자면,
아래의 것들이 각 브랜드의 상징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카카오 미니 광고에서 [hey kakao] 글자가 크게 나오는 것
클로바를 부르면 에메랄드 빛 조명이 딩- 하며 켜지는 것
구글 홈 미니의 '도넛 샵' 마케팅
삼성이 가진 다양한 브랜드들을 상하 연관관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인 플랫폼 브랜드는 각종 기술과 제품들 간의 하이어라키를 만드는 것이 영 쉽지 않다. 어떤 기술은 낯선 네이밍이나 약어를 붙임으로써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것이 플랫폼 브랜드가 가진 체계화의 어려움이다.
기획자들은 홍보 관점에서 자사가 보유한 플랫폼과 기술들을 B2B, B2C 대상으로 쇼윈도(웹사이트)에 전시하고 싶고, 알려주고 싶다.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브랜드 체계화'일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전시해 놓은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면 가지런하든, 아니든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술 브랜딩 시의 체계 정립은 각 요소의 ‘정의’, 정의를 통한 '관계 설정'이라는 절차를 꼭 거쳐서 진행해야 한다.
공급자 중심의 관점 = 이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정리]하는가
소비자 중심의 관점 = 이것이 [무엇]이고 저것과 무슨 [관계]인가
플랫폼 브랜드는 다른 브랜드보다 빠르게 대응하고 변화해야 한다. 이 말인 즉슨, 대단한 차별화라기보다 우리 플랫폼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플리케이션이나 웹 등에서 '열일'하고 있다는 단서를 계속 던져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벤트가 될 수도 있고, 배너를 활용한 홍보가 될 수도 있다. 어느 기획자가 쓴 디지털 시대의 브랜드 마케팅에 대한 글 중, 영국 marmite라는 과자 브랜드의 슬로건을 인용한 것이 인상깊었다.
Love it. Hate it. Just Don't Forget it.
플랫폼 브랜드의 브랜드 메시지 또한 위의 슬로건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용자들이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그들이 우리 플랫폼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브랜드의 적신호가 될 것이다.
또, 언젠가 지나가며 읽은 기술 브랜딩에 관한 기사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기술 브랜딩은 Engineering 아닌 Emotioning
이 문장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한다 할 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것'은 언제나 통한다.
다소 차가운 IT, 플랫폼, 기술등을 따뜻한 온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하는 브랜드의 방향일 것이라 믿는다. 능력있는 디자이너란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직무는 BX디자인이라고 이름 아래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정확히 무슨 디자이너]인지는 나에게도, 동료에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변화하는 기업 내 디자이너의 추세일 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회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고있다는 사실이다. IT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아웃풋은 시쳇말로 ‘끼깔나지’ 않을 수도 있다. 브랜딩에 대해 몇 가지 장황한 의견을 내놓았으나, 정작 내가 오늘 해야하는 일은 배너 디자인일 수도, POP 디자인 일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직원들을 위해 티셔츠를 디자인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일들을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이러한 요소들을 제작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으로서 스스로가 기술, 서비스, 플랫폼의 인지도를 넓히고 브랜드의 지속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 분야의 브랜딩은 축제의 불꽃놀이 감상하듯 보는 게 아니라, 난초를 기르며 꽃이 피길 기다리듯, 아주 길고 꾸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디자이너로 오랜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다면, 세상이 나를 어떤 분야의 무슨 디자이너로 정의하든 그것의 협소한 영역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상 나를 무언가와 구분 짓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매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둘 것인지, 어떤 이유로 성취감을 가질 것인지, 나의 숲 그 가장 높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언제나 상상하고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하나의 전문성만 가지고 살아가기 힘들고, 시대의 온도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변화해야 하는 어찌 보면 고달픈 직업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성장하는 나를 보며 재미를 찾기도 한다. 연차를 쌓아가는 동안 갖은 시련과 그로 인한 고뇌가 수도 없이 일어나겠지만, 그 순간이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전이라면 어디에서건 조금만 더 버텨보기를 바란다. 다소 오래된 보수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되뇌며 종종 힘을 얻는다. [버티는 자가 이긴다]
역할이란 정의하는 만큼 커지고,
그에 따라 영향력도 확장된다. 몇 년 전의 웹 디자이너가 지금 UI/UX를 다루는 디자이너가 되었고 로고 디자이너가 BX디자이너가 된 것처럼 말이다. 빠른 발전과 더불어 수많은 것들이 쉽게 생성되고 도태하는 시대에, 브랜드 디자이너 또한 스스로 새로운 정의와 영역의 확장이 필요하다.
쉽게 생각하자. 브랜딩이란 대단한 기술이나 전문성이라기보다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플랫폼과 기술, 서비스가 정착하여 일반 사용자들의 삶에 작은 편리함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이 시대의 모든 IT 디자이너들이여 버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