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풍경을 받아들이기
서해 바다를 보러 갈 계획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물때이다. 조석(潮汐)이라고도 부르는 밀물과 썰물.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늘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서해를 찾아갔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모습을 마주하곤 낭패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30대의 중간 지점이다.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면 막연히 정말 어렸겠지? 싶은데 10년 전의 나는 지금과 같은 회사원 신분이다. 잠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사람의 얼굴은 가장 많이 짓는 표정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나 역시 어떠한 방향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겠지.
내 변화의 분기점은 어디일까? 다시 말해, 나의 밀물이 썰물이 되던 그때는 언제였지? 정확히 짚어보고 싶은 마음에 매년 이따금씩 끄적거린 짧은 메모들을 살펴보았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온전히 차오르지 못하는 것에 굉장한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갈증과 죄책감이 느껴지는 단어와 문장들이 가득했다.
점점 내가 잘했던 무언가에 대해 잊게 되고, 인정받던 순간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간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무기력하고 무능력해 보이는 나 자신이다. 돌파해야 한다.
2019.11.21
2019년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내가 상사에게 맞선 일이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가 만든 정의의 틀이 명확했고, 권모술수가 싫었다. 목소리를 내면 옳지 않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라고 굳게 생각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상의 이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많은 것이 나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굴복해야만 했고, 무너진 내 앞에 그나마 남아있던 기회의 문들이 눈앞에서 닫혔다. 지금에서야 그 일에 대해 글로 덤덤히 적어낼 수 있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내 모든 장기가 소금에 절여지는 느낌이다. 그 해가 나의 썰물이 시작되던 때인 것 같다. 내가 수년간 믿어온 정의는 무참히 구겨졌고 마음이 망가졌다. 가장 싫었던 것은 결국 힘의 논리를 인정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라는 바다는 깊은 곳에 금이 간 듯 빠른 속도로 얕아지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권태로운 태도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언가를 시작해도 결국 끝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네.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의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청춘(YOUTH) - 사무엘 울만
2019.12.9
당시 이 시를 어디선가 접하고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영혼이 늙고 있음을 느꼈고 불안했다. 하지만 내 바다의 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을 거스르는 일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열등감이라는 요소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사람인데, 마음이 건강할 때는 열등감을 불태우며 의지로 만들 수 있었지만, 마음이 꺾인 나는 열등감이 온몸에 쌓이고 자괴감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마음 상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영화처럼 하루아침에 새 사람이 되는 삶의 모습을 그려주면 좋겠지만 넘어졌다 일어나는, 썰물이 다시 밀물로 바뀌는 물때는 사람마다 다른 주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흐트러진 마음이 최근에서야 천천히 모이고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밀물과 썰물은 'Tide'라는 하나의 단어를 쓴다. 밀물이 든다는 [Tide comes in] 썰물이 나간다는 [Tide goes out]이라 표현한다. 결국 밀물도, 썰물도 '나'라는 하나의 바다이다. 나의 밀물과 썰물을 모두 경험하고, 그 촘촘한 시간과 주기를 기억하고, 표면이 보이는 때와 물이 가득 차올라 있는 나의 마음속 풍경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삶이 영원히 밀물인 사람은 없다. 나의 모든 세포들이 깨어나 에너지를 발휘하는 시기가 있듯, 내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기가 있음을. 그 정적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되 때가 되면 다음 밀물이 올 것을 믿어야 한다. 열정과 의지가 내 속에서 솟아오르듯, 불안과 상실의 감각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나의 불안을 마주했던 그때, 서해안에서 뻘밭을 마주할 때처럼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했지만 사실은 기대와 다른 나의 이면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창작과 농담이라는 책에서 가수 장기하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성공한 밴드를 10년간 이끌었고, 모두가 박수 칠 때 그 막을 내린 후 홀연히 떠나 아웃풋을 내거나 이야기를 전혀 쓰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가깝던 모든 것과 멀리하는 시기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신곡 창작에 대한 압박감이 들 때는 '안 만들어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안 만든다고 인생이 끝장나진 않으니까- 라며.
결론은, 안 하고 싶을 때 안 해도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듯, 안 하고 싶은 거 다 안 해도 된다. 불안에 휩싸여있던 나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던 위로의 말은 바로 이 말이 아니었을까 이제야 깨닫는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이 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 사람마다 탄성이 제각기 다르고, 사람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깊이도 다르겠지만 그에 따라 위로 튀어 오르는 높이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고 일어나면 요전 날의 슬픔도 흐릿해지듯 모든 마음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깨고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
선수들이 자신의 몸보다도 큰 태극기에 몇 번이고 펜을 그어가며 이렇게 적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그들의 노력이 느껴져 눈시울이 붉어지는 말인데, 이 선수들의 몇 기수 더 선배인 박지성은 이 문장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꺾일 땐 꺾여도 된다. 그래야 부러지지 않는다. 선수들이 안 꺾이고 싶어도 꺾일 순간들이 너무 많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라는 바다가 결코 가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주고 있다. 나도 나를 믿으려 한다. 나의 바닥도, 가득 찬 모습도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회복되는 마음을 느낀다. 조금 느려도 기쁜 마음으로, 차분히 기다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