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awrithink Feb 14. 2023

도덕과 명예 사이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을 플레이하며 얻은 것

오픈월드 게임의 장점은 자유도가 높다는 것이다. 자유도가 높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에 제약이 없고, 내 욕구에 따른 행동을 우선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권리를 얻을 것 같지만 게임은 삶을 대변한다. 요즘은 게임 속 세상에서도 자유 속의 책임을 요구한다.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게임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모여서 순위가 나뉘거나 선두자 반열에 올라야 하는 온라인 게임에는 영 재주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은 스토리가 있는, 그리고 제작사의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서 엔딩을 보고 나면 한동안 잊히지 않는 마치 영화 같은 류의 게임이다. 아는 사람이라면 알 법 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엘든 링>, <블러드 본>,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니어:오토마타> 등의 시리즈는 단순히 취미나 유흥을 넘어, 나의 삶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몇 해 전부터 마니아들 사이에서 엔딩에 대한 호평이 끊이질 않는 게임이 있다. 바로 <레드 데드 리뎀션>이라는 게임인데,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GTA(Grand Traft Auto) 시리즈로 유명한 락스타게임즈라는 제작사에서 만든 게임이다. 

GTA5와 Red Dead Redemption2의 타이틀 아트

이 게임은 19세기말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법자의 인생 이야기이다. 나는 갱의 일원이 되어 내가 속해있는 집단의 부와 명예를 위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이 게임을 웰 메이드(Well-made) 게임으로 추앙하는 데에는 미국의 시대상을 잘 고증하고 있다는 점이나, 미국의 각 지형과 환경에 따른 변태적인 생태계 구현, 미친 자유도 등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이 게임을 하며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나는 게임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마차를 끌어 도와주거나, 서부 연안에 서식하는 홍연어를 낚시하곤 했다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의 자유도가 무지막지하게 높아 오픈월드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자유를 감시하며 게임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해 주는 장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명예 랭크' 체계이다. 짐작할 수 있듯 기본 구조는 이렇다. 내가 사람들과 공존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 선행을 하면 명예를 얻으며, 반대로 무고한 시민을 해치거나 비겁한 짓을 일삼으면 명예를 잃는다. 여기서 내가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명예 시스템'은 명예보다는 도덕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어 명예와 도덕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

명예 | 名譽 | Honor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어떤 사람의 공로나 권위를 높이 기리어 특별히 수여하는 칭호

이 말인즉슨, 명예는 나 혼자 스스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행이나 성과를 불특정 다수가 의식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얻게 되는 무엇이다.

도덕 | 道德 | Morality

어떤 사회에서 사람들이 그것에 의하여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한
규범의 총체

명예와 다르게 도덕은 스스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나의 행동이 내가 속한 사회에서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감각은 이미 그 사람의 본성 깊숙한 영역에 잔잔히 녹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명예로운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의 이미지 차이에서도 우리는 이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명예 랭크를 올리고 싶다면 아래와 같은 행동을 하면 된다.


내가 속한 조직의 운영자금을 위해 물건이나 돈 기부하기

길을 가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도와주기
(뱀에 물린 사람, 덫에 걸린 사람, 말을 잃어 목적지까지 못 가고 있는 사람)

무고한 시민을 유괴하거나 강도짓 하는 사람을 참교육 시켜서 구원해 주기

마을의 거지와 노숙 참전용사 등에게 돈 주기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기

보안관을 도와 현상수배범 잡기


반대로 명예와는 거리가 먼, 무법자이자 약탈자의 길을 걷고 싶다면 아래와 같은 행동을 하면 된다.


무고한 시민들을 총으로 쏘기

가축이나 개들을 공격하거나 죽이기

시민의 집을 습격해서 집에 있는 물건들과 돈을 약탈하기

기차 강도가 되어서 탑승자의 돈 털기

길 가는 마차나 말을 습격해서 돈 털기

맹인 거지의 돈 훔쳐가기


사실 이 게임은 사용자들이 일탈과 비행(非行)으로의 길을 걷게끔 유도하며, 선행을 강제하지 않는다. 튜토리얼로 기차 터는 법을 알려주거나, 농장주를 무기로 협박하여 금고 위치정보를 얻는 법 따위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이 게임의 주인공부터 갱단의 무법자 총잡이인 것을 보면 말 다 했다. 사용자 등급은 당연히 19세 미만 플레이 불가이다.

어차피 게임인데, 뭐 어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제작사는 사용자에게 준 자유의 양만큼, 그들에게 적절한 죄책감과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명예 랭크'의 본질적인 역할이다. (실제로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 역시, 고리대금업 심부름을 하며 가난한 채무자들을 협박하여 대금을 걷어 가면서도 일기 속에 이건 못할 짓이라 적는 등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내적 갈등을 하는 듯하다) 


아래의 상황은 명예로 해석하기에 모호하거나 타인이 목격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제작사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명예 랭크에 영향을 주는 예이다.


- 낚시로 잡은 물고기 놓아주기 (동물 보호 - 명예랭크 UP)

- 나의 조직 캠프에서 건초를 나르는 등 잡역 하기 (봉사 - 명예랭크 UP)

- 나에 대한 현상금을 지불하거나, 보안관에 자수하기 (반성 - 명예랭크 UP)

-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민 협박하거나 죽이기 (폭행, 살인 - 명예 랭크 DOWN)

- 유괴범을 쏘려다가 실수로 인질을 쏘기 (폭행, 살인 - 명예 랭크 DOWN)

- 약탈자가 탄 말을 총으로 쏘기 (동물 학대 - 명예 랭크 DOWN)

- 약탈자가 데려온 나를 공격하는 맹견을 총으로 쏘기 (동물 학대 - 명예 랭크 DOWN)

- 사망한 시민의 주머니 털기 (절도 - 명예 랭크 DOWN)


아무도 보고 있지 않거나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행이나 악행은 플레이어의 본성에 기초한 가장 솔직한 행위일 것이다. 이 게임에서 약탈자를 소탕하는 다소 '대담한' 행위보다는 내가 잡은 물고기를 방류하거나, 참전용사들을 위한 기부금을 흔쾌히 넣을 것인지 무시하고 지나갈 것인지 혹은 그 금고마저 털어 도망갈 것인지 고민하는 찰나들과 아주 작은 결정들을 통해 플레이어는 본인이 평소에 가진 세상에 대한 관점과 도덕적 기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락스타 게임즈>라는 영민한 제작사는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의 감정을 철저하게 계획해서 건드리는 것 같다. 전작 GTA5에서도 역시 플레이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권리'를 부여받지만, 엔딩에서 마주하는 플레이어의 성향과 욕구가 고스란히 기록된 정신 감정 보고서를 읽으면 비로소 나의 행동들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된다.

침착맨이 GTA5를 플레이한 후 받은 최종 보고서 (출처:침착맨 유튜브)

이 외에도 플레이어가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갈등을 빚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가령, 팔이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낯선 사람을 도와주려고 말에서 내렸다가 그 사람이 도리어 플레이어의 말을 절도하여 달아났다. 다음에 만나는 낯선 사람을 어떠한 편견 없이 다시 도와줄 수 있는가? 
길을 가다 KKK 같은 사이비 결사 단체가 십자가에 불을 붙이다 자신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목도했다. 이들을 인류애로 도와주는 것이 도덕인가, 인류에 유해한 집단이기에 방치하는 것이 도덕인가?
나와 시민들을 공격하는 약탈자들은 잔인하게 죽어 마땅한가? 그들도 사람이기에 존엄하게 대해야 할까?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남편과 불륜남이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데 정작 불륜남의 힘이 더 세서 시민이 죽을 것 같다. 이 현장에 감히 끼어들어 편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처럼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게임 속 세상에서 나는 내가 가진 도덕적 기준과 여러 번 싸웠다.

미니 미션 중 하나인 <부정의 역사>에서는, 전 재산을 압류당한 후 슬퍼하는 노숙인을 돕기 위해 그의 압류당한 집에 들렀다가 그가 흑인 노예들을 지하에 가두어 고문한 흔적을 보게 된다. 온갖 불쌍함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던 노인이 다름 아닌 노예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에 그를 총으로 쏘아 부정의 역사를 끝낼 것인지, 그럼에도 살려 둘 것인지 순수히 내 자유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차마 무릎 꿇고 울고 있는 노인을 총으로 쏠 수 없어 말을 돌려 돌아갔지만, 후에 찾아보니 그를 죽음으로 이끌면 오히려 '명예 랭크'가 올라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제작진은 인류애보다는 정의를 상위 관념으로 생각한 것 같다)

돌아보니 이 게임에서 말하고 있는 '명예'란, 어찌 보면 사회적인 시선을 받고 있든 아니든 간에 플레이어 본인이 가진 신념의 굳기를 바탕으로 한 도덕성과 정의감, 그리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또 이 행위들이 일관적이고 연속성 있게 이어져서 그에 따라 자연히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게임 속 스토리의 후반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엔딩은 마주하지 못했고 기대감에 부풀어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 또한 영화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물이기 때문에 제작자의 생각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플레이하는 곳곳에 숨겨져 있는 점이 나로선 매우 흥미롭다. 영화가 순차적이고 계획된 루트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면, 오픈월드 게임의 장점은 내가 직접 단서를 찾고 조합하며 스토리와 각 장치, 요소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직접적인 탐구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 이 게임을 하며 명예와 도덕이라는 관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만큼 내가 가진 신념과 정의에 대한 잣대는 무엇인지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시선과 관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