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5년이 지난 20년보다 훨씬 앞서있고 놀라운 미래가 펼쳐지겠지만 한편으로 기술의 대한 염려가 매우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과학적이고도 논리적인 접근으로 기술이 발전하겠지만 그 기술이 발전함에 있어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는 인문적 소양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2000년 초반에 등장한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의 개념과 인공지능이란 분야가 처음으로 인식한 것이 70년도 넘었다. 하지만, 더디가 진행된 것은 아무래도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를 따라 잡지 못해서였던 것이고 불과 몇 년 사이에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점점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다시금 인문학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요즘, 우리의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이 몇 년이 흘렀다. 과연, 제대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하다. 사실, 필자가 느끼는 인문학은 이런 것이다. 과연,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배울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어디 사람이 공부한다고 배워지는 것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라는 옛 말이 알려주듯이.
"사람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은 그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고 그러면 그 입장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라는 고사성어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즉, '인문학을 공부하자'라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고민해 보자”라는 것으로도 풀이해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확대해 볼 때, 기업에서의 인문학적 입장이란 것은 쉽게 풀이해 보면 사용자의 입장에서 상품을 바라보자라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 즉 제조자의 측면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제조자는 그 상품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상품을 조작할 때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이해하여 잘못된 수행을 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조작하게 된다. 이후의 반응을 기대하면 이전 작업을 수행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상품이 소비자에게 처음 전달되고 나면 상황은 매우 다르다. 소비자는 다음의 일을 기대하지 않고 작업을 수행한다. 반복적인 수행학습을 통해서 작동법을 익힌 후에 사용한다는 것이 다른 부분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학습 초기 단계에서 실패율이 높아지면 사용률이 급속하게 떨어진다. 다시는 그 상품이나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부분은 기업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문학 열풍이 분 것이 왜 일까? 왜 인문학이 중요한가? 정작 취업 시에는 이공대 학과들이 인기인데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필자를 비롯해서)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전 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어디를 찾아 가고자 할 때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큰 수고 없이(표지판을 매번 확인해야한다거나 등) 알려주는 대로만 가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릴 적부터 이런 스마트 기기들에 둘러쌓이게 됨에 따라 그 현상이 더 악화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이란 것이 없어질테고, 그러다 보면 ‘사고의 방법’을 잃어버릴테고 마지막에는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수학의 핵심은 뭘까? 바로 사고의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맹점은 있다. 공식에 따라 풀어야 답이 나오는 것이고 반드시 정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디 인간사가 과연 정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실생활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 바로 인문학을 통해서 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야하고 그 문제의 본질은 단편적이 아니라 지극히 통섭적인 차원으로 봐야 답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서 나오는 답과 어떤 공식(있다면,…)에 의해서 나오는 답은 질적인, 양적인 차이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적절한 답이 있을 뿐이다.
생각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더 생각해야하고,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가는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 본연이 욕구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목적은 문학, 역사, 예술 등을 단순히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런 문학이 나왔고, 역사가 기록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예술로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문맥적이고 전체적인 입장에서 사고하는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