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이해하는 나
일기를 써 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종종 텅 빈 일기장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이다. 지나간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꼈는지 묻는 그 백지 앞에서, 정작 '나'라는 존재는 안갯속처럼 희미하다. 그저 바쁘게 지나온 시간을 반추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어떤 기억, 혹은 방금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촉매가 되어, 잊고 있던 감정의 편린이나 생각의 조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우리는 '깨달음' 혹은 '통찰'이라 부르곤 한다. 이것이 바로 '나를 이해하는 경험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 '이해', '경험'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철학적 기둥이 서로를 지탱하며 서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둥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내면의 지도를 완성해 가는지 차분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실존하는 본연의 자아, 즉 관찰의 대상이 되는 어떤 고유한 존재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란, 전통적으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를' 이해하는 행위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보의 원천이 외부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진공 속에서 사유할 수 없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겠는가. 어떤 외부의 입력, 즉 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간 풍경, 혹은 예상치 못한 비판과 같은 '촉매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 외부의 자극은 우리 내면의 반응을 촉발시킨다. 가슴이 철렁하거나, 얼굴이 뜨거워지거나, 특정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것. 이것이 바로 '이해'가 감지해야 할 내부의 정보다. 즉,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외부의 촉매에 의해 촉발된 나의 내적 반응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아내는, 안으로 향하는 식별 행위다.
여기서 마지막 부분인 '경험'이 등장한다. '이해'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는 행위라면, '경험'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자신에게 특정한 '의미'로 다가올 때, 비로소 그것은 단순한 사건(event)이 아닌 자신의 '경험(experience)'이 된다. 이 과정은 우리의 기억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장기기억과 단기기억, 그리고 메타인지를 떠올려보면 이 관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의 '장기기억'은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사건과 감정, 지식이 저장된 거대한 '옷장'과도 같다. 그 안에는 우리가 존재조차 잊고 있던 수많은 옷(기억)들이 걸려있다. 반면 '단기기억'과 '메타인지'는 그 옷장 앞에 서서 지금 입을 옷을 고르고 비춰보는 '거울 앞의 자신'이다. 우리는 메타인지를 통해 "내가 지금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라고 자문하며 거울 속 자신(단기기억 속 감정)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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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울 앞의 옷만으로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나를 이해하는 경험'이란, 바로 그 거대한 옷장(장기기억)에서 잊고 있던 옷(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일' 그 자체다. 이것은 결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 외부 세계로부터 수신했던 수많은 감각 정보와 기억들을 창의적으로 '재조합'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것을 '창조적 인출(Creative Retrieval)'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발명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유독 심하게 일을 미루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해'는 "나는 지금 불안해서 일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왜 나는 유독 이럴까?"라는 메타인지적 질문을 들고 옷장, 즉 장기기억을 뒤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 작은 실수에도 크게 질책받았던 기억(오래된 옷)을 꺼내 온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지금의 불안은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낸 '실패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라는 옷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이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을 성공적으로 연결하여 그 '의미'를 해석해 내는 순간, 우리는 '나를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창조적 인출'의 메커니즘은 비단 개인의 내면 탐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들 역시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의 순금 여부를 밝혀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고심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부력의 원리나 물질의 밀도에 대한 개념(장기기억 속 옷)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들은 옷장 속에서 각기 다른 옷걸이에 걸려 있었을 뿐, 왕관 문제라는 '거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목욕탕에 들어서는 순간(외부 촉매),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내부 데이터 감지) 그는 옷장 속의 두 개념을 꺼내어 '넘치는 물의 부피가 곧 내 몸의 부피'라는 '완벽한 한 벌'(통찰)을 조합해 낸다. 그는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나갔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인출'의 극적인 순간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극을 통해 자신의 거대한 기억 저장고에서 필요한 조각들을 꺼내어 새롭게 연결했을 뿐이다.
음식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혹은 깨닫게 되는 그런 감성의 영역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창조적 인출'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복원해 내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사례다. 소설 속 화자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맛본다(외부 촉매). 그 맛은 단순한 미각 정보를 넘어,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거대한 기억의 옷장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가 된다. 그는 그 맛과 향기를 매개로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보냈던 주말의 공기, 숙모의 방, 마을 사람들의 모습(장기기억 속 옷들)을 통째로 '불러온다'. 마들렌이라는 촉매가 없었다면 영원히 잊혔을지도 모르는 그 기억들은, 현재의 '자신'과 연결되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아르키메데스가 논리적 연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면, 프루스트는 감각적 연결을 통해 자아를 복원했다. 두 사례 모두, '나를 이해하는 경험'이란 결국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임을 증명한다.
결국 '나를 이해하는 경험'이란, 내 안에 거대하게 축적된 기억의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불러와 지금의 자신에게 비춰보고, 그 조합의 의미를 해석해 내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하고-연결하고-해석하는' 과정 그 자체다. 우리가 일기장 앞에서 느꼈던 그 막막함은, 사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어떤 옷을 꺼내야 할지, 그 옷장 문을 여는 방법을 잠시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창한 탐구가 아니라, 오늘 자신을 스쳐간 외부의 자극이 내 옷장의 어떤 옷을 건드렸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성실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이 과정을 의식적으로 연습해 볼 수 있다. 거대한 옷장 전체를 한꺼번에 정리하려 들면 금방 지치고 만다. 대신 '하루에 옷걸이 하나'만 꺼내보는 작은 실험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잠들기 전, 오늘 유독 마음을 흔들었던 하나의 감정이나 사건(촉매)을 고른다. 그리고 자문해 본다. "이 느낌은 내 옷장 속 어떤 기억(옷)과 연결되어 있을까?" 처음에는 잘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능숙하게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며 스스로를 이해하는 경험을 일상처럼 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옷장에는 지금 어떤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가. 그리고 오늘, 당신은 그 기억들로 어떤 새로운 의미를 조합해 낼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당신 '자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