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있었던 경험의 정의
우리는 종종 '경험'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 어떤 곳을 방문하고, 무언가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경험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겪는 그 모든 순간들이 그저 감각의 나열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는다는 것은 단순히 오감을 통해 데이터를 수신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왜 전혀 다른 기억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경험'이라는 단어의 표면 아래로 더 깊이 파고들어 그 함의를 찾게 만든다. 어쩌면 경험이란, 감각을 통해 들어온 날것의 정보가 우리의 생각과 사유라는 위를 거쳐 한 차례 소화되고 변환된 후, 기억 속에 저장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저 저장된 채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다시 불려 나와 외부로 표현될 때, 즉 타인에게 전달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가시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경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건은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게 하거나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을 타자에게 전달하여 가치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그것을 또 '경험'이라 부르는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경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행동을 '수동적인 반응'과 '능동적인 대응'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곤 한다. 수동적인 반응은 마치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처럼, 외부의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본능적인 행위이다. 반면 능동적인 대응은,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의식적으로 가장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는, 적극적이고 고차원적인 행위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비난했을 때 즉각적으로 화를 내며 맞받아치는 것은 '수동적 반응'이고, 잠시 숨을 고르며 분노를 관찰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하고 되묻는 것은 '능동적 대응'이라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시스템 1(빠르고 본능적인 사고)'과 '시스템 2(느리고 분석적인 사고)'의 구분과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고 항상 의식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더 성숙한 태도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이런 흑백논리는 우리가 겪는 실제 경험의 복잡다단함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기 그지없다. 과연 우리의 모든 행동이 이 두 가지로 깔끔하게 나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수십 년간 무술을 연마한 달인이 상대의 주먹을 보고 0.1초 만에 몸이 저절로 움직여 막아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의식적인 '대응'이라기엔 너무 빠르고 자동적이지만, 단순한 '반응'이라고 하기엔 수많은 훈련과 전략이 축적된 결과이다. 이것을 '수동적 대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예술가가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격렬한 분노나 슬픔(수동적 반응,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경우)을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그 감정의 파도를 의식적으로 타면서 붓을 휘둘러 걸작을 탄생시키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감정이라는 본능적 '반응'을 '능동적으로' 활용한 사례, 즉 '능동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이처럼 네 가지 사분면, 즉 수동적 반응(본능), 능동적 반응(본능의 활용), 수동적 대응(자동화된 숙련), 그리고 능동적 대응(의식적 전략)이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난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베테랑 소방관은 불을 보는 순간 공포라는 '수동적 반응'을 느낌과 동시에, 그 아드레날린을 집중력으로 바꾸는 '능동적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고 수천 번 훈련한 대로 호스를 연결하고 장비를 점검하는 '수동적 대응'을 기계처럼 수행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바닥 붕괴라는 새로운 변수 앞에서는 모든 것을 멈추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동적 대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복잡한 경험의 매트릭스를 마주하다 보니, 더욱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이 네 가지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 이런 복잡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 질문은 이미 오래전 위대한 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주제이다. 존 로크 같은 경험론자들은 우리의 마음이 '빈 서판(Tabula Rasa)'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태어나, 오직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텅 빈 집에 외부에서 '가구'를 하나씩 들여놓는 것과 같다. 우리가 겪는 모든 감각 데이터(가구)가 쌓이고,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반성'하고 조합하며(능동적 대응) 지식의 체계를 만든다. 이 관점은 우리가 어떻게 학습하고 성장하는지, 특히 '능동적 대응'의 측면을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는 여기서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 "가구를 들여놓으려면, 애초에 그 가구를 담을 '집'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로크가 '가구'에만 집중했다면, 칸트는 그 '집'에 주목했다. 칸트에게 마음은 텅 빈 서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건축 양식'을 갖춘 집과 같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시간'이나 '공간', '인과율'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 마음의 선천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틀(집)이 있기에, 비로소 우리는 외부의 감각(가구)들을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선험적 구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항상 작동하는 마음의 운영체제이며, 우리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규칙이다. 이것은 "그냥 스스로 거기에 있는" 우리 정신의 기본 설계도이다. 이 칸트의 '집'은 우리가 논의했던 '수동적 대응'(자동화된 숙련)이나 '수동적 반응'(본능)이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토대를 설명해 준다.
결국,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와 '경험'을 다시 정의해 볼 수 있다. 경험이란 칸트의 '집'(선험적 구조)도, 로크의 '가구'(후험적 감각)도 아니다. 경험이란, 이미 지어진 우리 마음이라는 '집' 안에, 세상이라는 밖에서 가져온 수많은 '가구'들을 끊임없이 들여놓고, 배치하고, 사용하고, 때로는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역동적인 '과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본능적인 반응, 그 본능을 활용하는 열정, 수없이 반복하여 자동화된 숙련, 그리고 의식적으로 최선을 선택하려는 전략적 사유가 모두 포함된다. 경험의 범위가 그토록 넓고 정의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경험의 주체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실천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 이상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수동적 반응'을 보인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수동적인 반응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우리 마음이라는 '집'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설계이자, 인간적인 현상이다. 대신 우리는 두 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 하나는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유용한 기술들을 '수동적 대응'의 영역으로 자동화시키는 것, 즉 '숙련'을 쌓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잠시 멈춤'의 힘을 길러, 더 많은 순간에 '능동적 대응'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휘둘리는 존재도, 우리의 대응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마음의 '집'을 끊임없이 보수하고, 가꾸고, 때로는 새로운 가구들로 채워나가는 집안의 관리자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