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는 오직 맥락에 따라 정의된다.
"인간 행동들의 개인차를 설명하도록 해준 흥미로운 발견들 중 일부는 바로 이 신경전달물질의 생성량과 방출량, 수용체나 재흡수 펌프나 분해 효소의 양과 기능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행위는 오직 맥락에 따라 정의된다."
- 행동, 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에 관한 모든 것 / 로버트 M, 새폴스키
문득 낯선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불안하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우리는 휴식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정적과 마주하면(특히, 불 꺼진 집으로 들어섰을 때의 정적 등) 본능적으로 그것을 회피하려 하고 공간의 어떤 소리, 즉 음악이나 TV소리 등으로 가득 채우려 하는 이 모순적인 감정의 뿌리 말이다. 이런 감정을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몸과 뇌에 새겨진 더 깊고 원초적인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쯤은 한 번씩은 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M. 새폴스키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행동'에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유전자로 대변되는 인간 자체인가, 아니면 경험과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적인 행위인가. 우리는 흔히 이 둘을 구분하려 애쓰지만, 새폴스키가 제시하는 답은 명쾌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은 이분법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재정의하는 '순환 고리'라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신경전달물질의 생성량과 수용체의 민감도를 언급하며 던진 화두다. 우리의 생물학적 하드웨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맥락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모한다. 즉, 행위는 오직 맥락에 따라 정의되며, 그 맥락은 다시 인간 자체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느꼈던 불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은 DNA라는 이중 나선형 구조의 설계도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설계도 위에 집을 짓는 것은 경험이라는 벽돌이다. 그리고 한번 지어진 집의 구조는 다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
이 메커니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이야기다. 수년 동안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생존한 군인을 상상해 보자. 그에게 전쟁은 비일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살기 위해서 그의 뇌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적응해야만 했다. 작은 소리에도 즉각 반응하도록 편도체는 비대해지고, 노르에피네프린과 같은 각성 호르몬은 댐이 무너진 듯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최적화다. 그의 인간 자체는 전쟁이라는 맥락에 맞춰 완벽하게 재조립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군인이 전쟁이 끝난 후, 아무런 위협도 없는 평화로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행복하고 편안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조절하던 그 강력한 메커니즘이, 조절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평온한 상태를 직면하는 순간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뇌는 이미 고강도의 자극에 맞춰 튜닝되어 있는데, 외부의 자극이 뚝 끊겨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속 300km로 질주하던 레이싱카가 갑자기 어린이 보호구역에 멈춰 선 것과 같다. 엔진은 여전히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데 차는 멈춰 있으니, 내부는 과열되고 진동은 극에 달한다. 군인에게 평화는 안전한 상태가 아니라,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정적, 즉 또 다른 공포의 맥락으로 해석된다. 뇌가 평화를 낯선 공허로 인식하고,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스스로 불안이라는 유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뇌과학에서는 기준점의 이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전쟁에 맞춰 기준점이 이동해 버린 뇌에게 평화는 비정상적인 결핍 상태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를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전쟁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양복을 입은 군인과 다를 바 없다. 매일 쏟아지는 업무,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성과에 대한 압박 속에서 우리의 뇌는 전쟁터의 군인처럼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연료 삼아 질주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을 떠올려보자. 그는 힘들다고 불평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스러운 자극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뇌는 쏟아지는 신경전달물질의 홍수 속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인 조치를 취한다. 바로 수용체의 감소, 즉 하향 조절이다.
이 과정을 야구 경기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투수가 신경전달물질을 던지는 세포라면, 포수는 그것을 받는 수용체다. 평소라면 투수가 공을 10개 던지고 포수가 10개의 글러브로 그것을 받아낸다. 아주 이상적인 균형 상태다. 그런데 격무라는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면 투수는 갑자기 공을 100개씩 던지기 시작한다. 포수는 감당할 수 없는 공의 개수에 압도당하고, 결국 손을 보호하기 위해 글러브를 치워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100개의 공이 날아와도 글러브가 1개밖에 없다면 실제로 받는 자극은 미미해진다. 이것이 뇌가 과도한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이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귀를 막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 직원이 한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프로젝트가 끝나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때 발생한다. 투수는 이제 다시 평소처럼 공을 10개만 던진다. 하지만 포수의 글러브는 여전히 1개뿐이다. 예전 같으면 10개의 공을 다 받아내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을 텐데, 지금은 10개 중 9개를 놓치고 만다. 뇌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즐겁지도, 흥분되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지독한 권태'와 '공허함'뿐이다. 이 직원이 느끼는 불안감은 성취욕이 강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도파민 수용체가 고갈되어 평범한 자극으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공허함을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줄어든 글러브로도 예전 같은 자극을 느끼기 위해 투수에게 공을 더 세게, 더 많이 던지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 중독, 도박, 알코올, 혹은 끊임없는 스마트폰 스크롤링과 같은 행위 중독으로 이어진다. 공이 10개로 줄어든 평온함을 견디는 대신, 억지로 공을 100개, 200개로 늘려 뇌를 다시 혹사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결국 안정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독한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그 지루함과 공허함 속에 숨어 있다. 줄어든 수용체를 다시 늘리는 과정, 즉 상향 조절은 절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멈춰버린 공장 라인을 다시 정비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기계를 들이고 설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시끄럽게 돌아가던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고 문을 닫아야 한다. 생산이 멈춘 그 조용한 시간 동안 공장 밖에서는 왜 물건이 나오지 않느냐고, 망한 것이 아니냐고 아우성칠지 모른다. 하지만 공장 내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지루함과 불안은 바로 이 뇌의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다. 도파민이라는 시끄러운 쾌락이 멈춘 순간, 비로소 뇌는 손상된 세포를 복구하고 사라진 수용체를 다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 제조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공이 10개만 날아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10개의 글러브를 가진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극이 결핍된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을 견디는 힘은 충동을 억제하고 미래의 가치를 선택하는 전두엽의 기능에서 나온다. 당장의 쾌락을 외치는 변연계의 비명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그 고요함을 응시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뇌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는 적극적인 투쟁이다.
인간 자체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행동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조각해 나간다. 과거의 경험이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도록 만들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인내는 미래의 우리를 또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새폴스키가 말했듯, 행위가 맥락에 따라 정의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더 나은 맥락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머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도파민이 터지는 화려하고 시끄러운 순간이 아니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진정한 성장이 일어난다.
오늘 당신이 마주한 무료함이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지금 당신의 뇌는 열심히 공사를 진행 중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되찾기 위해, 당신은 지금 가장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불안해하며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대신, 그 공허함을 꽉 껴안아 보는 것은 어떨까. 그 고요한 틈새에서 비로소 우리는 환경에 휘둘리는 반응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밀도를 조절할 수 있는 체화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조용한 순간을 견디는 힘, 그것이야말로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강력한 생존 기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