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과 기획

선험적 지식과 기획의 만남

by 닥터브룩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기획'을 한다. 거창한 사업 계획이나 상품 기획이 아니더라도, 다가오는 주말에 누구를 만날지,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혹은 헝클어진 내 삶의 궤적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하는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기획의 연속이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내려 할 때마다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곤 한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단어가 부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막상 밖으로 꺼내놓고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처럼 느껴져 황급히 지워버리곤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구체적인 현실로 만드는 일을 이토록 어려워하는 것일까. 왜 어떤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혁신이 되고, 어떤 생각은 그저 허무한 공상이 되어 사라지는 것일까. 이 질문은 단순히 업무 스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본질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도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 이 막막함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의 산책자, 임마누엘 칸트의 지식을 잠시 빌려 써보려 한다. 그리고 그 철학적 시선 끝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생각의 탄생', 그 경이로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획한다는 행위, 즉 실무에서 흔히 '아이디에이션(Ideation)'이라 부르는 이 과정은 철학적으로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날것의 재료를 우리 머릿속으로 가져와 요리하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라고 했다. 물자체는 우리의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실재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물자체가 우리의 감각이라는 필터를 통과해 들어온 데이터, 즉 '직관'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기획의 첫 번째 단추가 끼워진다. 우리는 흔히 기획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획은 외부의 혼란스러운 데이터들을 내면의 논리틀로 걸러내어 의미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마치 디지털 시대 이전,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과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은 필름 위에 맺히지만, 현상되기 전까지 그것은 아무런 형체가 없는 잠재태(Potentiality)에 불과하다. 암실에서 약품 처리를 거치고 인화지 위에서 서서히 이미지가 떠오르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그것을 '사진'이라 부르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기획이란 바로 이 '현상'의 과정이다. 머릿속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직관의 필름을 꺼내어, 논리라는 약품 처리를 거쳐 구체적인 결과물로 인화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디에이션의 본질인 셈이다.

그러나 이 현상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칸트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기획자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nyygflnyygflnyyg.png


첫째는 '내용 없는 사고', 즉 현실의 데이터 없이 머릿속으로만 지어낸 '책상물림'의 기획이다. 시장의 상황이나 고객의 목소리라는 재료 없이 논리만 완벽하게 짠 기획은 공허하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완벽할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유령과 같다. 둘째는 '개념 없는 직관', 즉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데이터 덩어리다. 아무리 많은 조사를 하고 자료를 모아도 그것을 꿰뚫는 하나의 관점이나 콘셉트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진정한 기획은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들어온 정보를 정리하는 것을 넘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최초의 정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으로 중요한 통찰에 도달한다. 흔히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들, 예를 들어 '총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본다면, 누군가 처음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총각이라 부르자"라고 정의하기 전까지, 세상에는 그저 남자와 여자만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그저 개인의 사정일 뿐, 사회적으로 구분되는 범주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그 상태에 '총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린 순간, 세상은 '기혼남'과 '미혼남'으로 쪼개지며 새로운 질서와 지식이 탄생했다. 즉, 정의(Definition)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발명이다. 이것이 바로 기획의 정수다. 우리가 하는 기획이 단순히 기존의 자료를 짜깁기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이디에이션이 아니다. 흩어져 있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그들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기획자가 가져야 할 태도다.


이러한 '명명(Naming)'의 기술을 가장 탁월하게 구사한 사례로 우리는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떠올릴 수 있다.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를 기억해 보자. 그는 단순히 세상에 없던 기술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터치스크린, 인터넷, MP3 플레이어, 전화기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던 각각의 직관들이었다. 만약 그가 이것들을 단순히 물리적으로 결합하여 "인터넷이 되는 터치스크린 전화기"라고 설명했다면 그것은 기술적 설명서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인간의 경험을 확장하는 도구로 재정의했고,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낯선 기계를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책장, 휴지통, 바탕화면 같은 '은유(Metaphor)'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애플의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HIG)'이 강조하는 은유는 단순히 화면을 예쁘게 꾸미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낯선 '물자체(복잡한 디지털 기술)'를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현상(직관적인 경험)'으로 번역해 주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도구였다. 그는 기술이라는 차가운 이성에 인문학이라는 따뜻한 직관을 입혀, 전무후무한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엉뚱한 것들을 연결한다고 해서 모두가 혁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난센스'나 '억지'가 되기도 한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이성이 현실의 제약을 무시하고 날뛰는 '선험적 환영'에 빠진 상태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흥미로운 반론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과연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을 기획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랑은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은 조건 없는 사랑을 예찬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결혼 생활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경제적 조건, 집안 배경, 생활 습관의 효율성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제약 조건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랑은 종종 파국을 맞이한다. 어떤 이들은 사랑에 조건을 따지는 것을 속물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이는 매우 타당한 '도식화(Schematism)' 과정이다.


추상적인 '사랑(이념)'을 구체적인 '생활(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조건)'이라는 뼈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의 조건을 따지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따라서 훌륭한 기획은 가장 엉뚱하고 창의적인 상상력(통섭)을 발휘하되, 그 실행 단계에서는 가장 냉혹할 정도로 현실적인 효율성을 검증하는 과정, 이 두 가지 모순의 통합이어야 한다. 이것은 '심미적 실용성'이라 부를 수 있다. 논리는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 쓸모는 철저히 직관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기획이라는 것이 단순히 문서를 꾸미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숭고한 정신 활동이다. 칸트가 말한 오성(지성)이 재료를 요리하는 도구라면, 그 도구를 움직이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사람의 직관과 통찰이다. 당신의 기획이, 당신의 생각이 자꾸만 겉도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어 질문을 던져보라. 나는 지금 책상 위에 앉아 텅 빈 논리만 굴리고 있는가, 아니면 현실의 맥락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고통과 욕망을 '직관'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 관찰된 사실들에 남들이 쓰는 낡은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가, 아니면 나만의 관점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가.


삶도 기획과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우리 앞에는 예측할 수 없는 하루라는 '물자체'가 놓인다. 어떤 이는 그것을 그저 흘러가는 시간으로 방치하지만, 어떤 이는 그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흩어진 경험들을 엮어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한 기획서가 아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런 정의도 내리지 못한 채, 흐릿하게 현상되다 만 필름처럼 모호하게 흘러가버리는 우리의 시간들이다. 오늘 당신의 노트에 적힌 생각들이 비록 지금은 엉성해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은 지금 혼돈 속에서 질서를,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최초의 정의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정의자로서, 오늘 당신의 세상에 어떤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그것들로 하여금 불러올 새로운 현상이 앞으로 펼쳐질 내일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타인이라는 지옥, 그리고 관계의 지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