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라는 지옥, 그리고 관계의 지정학

그게 나일수도 있다.

by 닥터브룩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겪는 스트레스의 8할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통설이 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지만, 그 소통의 과정이 늘 매끄러운 것만은 아니다. 조직이나 공동체를 관찰하다 보면, 유독 소통의 흐름을 막히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특정 유형의 인간 군상들이 목격된다. 이들은 악의를 가지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화법과 태도로 관계의 피로도를 급격히 상승시킨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좌절감,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막막함은 비단 개인의 예민함 탓이 아니다. 이는 소통의 메커니즘을 파괴하는 두 가지의 지배적인 유형, 즉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스트'와 '회피적 산만함'을 가진 이들이 대화의 판을 어떻게 흔드는지 냉철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유형은 대화의 목적을 오로지 '자기 과시'에 두는 부류다. 조직 내 회의 시간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이들의 행동 양식은 매우 전형적이다. 누군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나 특정 상황(A)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면, 이들은 끝까지 경청하는 법이 없다.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고 들어와 "아, 그건 당신이 말하는 상황과 똑같은 거죠.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라며 상대의 경험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의 범주로 도둑질해 버린다. 이러한 '맥락의 도둑질' 현상은 상대방이 가진 경험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려는 권력욕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이들은 상대의 말꼬리를 잡거나 미묘하게 비꼬는 태도(Sarcasm)를 유머로 포장하며, 타인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도 한다.


두 번째 유형은 대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산만한 회피형'이다. 이들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순간이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뜬금없는 웃음을 터뜨리거나 논점을 흐리는 농담을 던진다. 누군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면 "아, 그건 아니죠"라며 즉각적으로 부정하지만, 그 부정에는 논리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이들의 거절은 타당한 반론이라기보다, 복잡한 사고 과정이나 감정적 부하(Load)를 감당하기 싫어하는 지적 게으름, 혹은 심리적 방어 기제에 가깝다. 대화의 핑퐁이 이어져야 할 순간에 공을 엉뚱한 곳으로 던져버림으로써 게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해도 통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적 개념인 '과제 분리(Separation of Tasks)'의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피로감의 본질은 그들의 미성숙한 태도 그 자체보다는, 그들을 '이해시키고 개선해야 한다'는 강박을 우리의 과제로 착각하는 데서 온다. 나르시시스트의 과시욕이나 회피형의 산만함은 그들이 평생에 걸쳐 형성해 온 그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자 해결해야 할 그들의 과제다. 타인이 개입하여 고쳐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려 하거나 그들의 무례함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불가피하게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내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단순히 무시하거나 참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보다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인간관계의 경영' 기술이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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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기 자랑과 깐죽거림이 주특기인 A유형에게는 '회색돌 기법(Gray Rock Method)'이 유효한 방어 기제가 된다. 그들이 대화에서 얻고자 하는 보상은 타인의 감정적 동요나 인정이다. 따라서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반응, 마치 길가의 회색 돌처럼 흥미 없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주면 그들은 더 이상 대화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흥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비즈니스 관계처럼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그들의 욕망을 역이용하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명예 고문 추대 전략'이다. 그들의 과시욕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오히려 "역시 이 분야에 정통하시군요. 전문가로서 견해를 들려주십시오"라며 그들의 에고(Ego)를 한껏 세워주는 것이다. 단, 그 에너지가 개인의 자랑이 아닌 공동체의 문제 해결로 흐르도록 물꼬를 터주는 것이 핵심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대신 쓸모 있는 아군으로 활용하는 방법인데, 역시 쉽지 않겠다.


반대로 산만하고 회피적인 B유형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적 압박이 아니라 '심리적 안전지대'의 제공이다. 그들이 맥락 없이 웃거나 대화를 끊는 기저에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이들에게 "왜 집중하지 않느냐"라고 다그치는 것은 그들을 더 깊은 방어 기제 속으로 숨게 만들 뿐이다. 대신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 편안하게 의견을 말해달라"며 대화의 진입 장벽을 낮추거나, 복잡한 과제를 아주 작고 구체적인 단위로 쪼개어 질문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는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넓은 운동장 대신 좁은 골목길을 안내해 주는 것과 같다. 상대가 감정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산만함이라는 안개는 걷히고 본질적인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엄청난 감정 노동을 수반한다. "왜 내가 굳이 저런 사람들을 위해 전략까지 세워가며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질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보상이 없는 노동은 착취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감정 노동의 대차대조표를 다시 작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노력의 최종 수혜자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관찰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간 군상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들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인생이라는 긴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의 거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타인의 무례함을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였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듯, 무례한 자를 만나면 마음의 방패를 꺼내면 된다고 여겼다. 나아가 니체는 이러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는 과정이 인간을 '초인(Übermensch)'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대를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대신, 그들을 임상 실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 "저 사람은 지금 인정 욕구가 발동했군", "이 사람은 지금 불안해서 회피하고 있군"이라며 그들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순간,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아닌 상황의 주인이 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타인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수련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소리 나지 않는 악기나 튜닝이 덜 된 악기 탓을 하며 연주를 중단하지 않듯, 성숙한 어른은 관계의 불협화음조차 전체의 하모니를 위한 하나의 요소로 관리한다. A유형의 과시욕을 적절히 충족시켜 팀의 성과로 연결하고, B유형의 불안을 잠재워 과업에 집중시키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십이자, 인간관계의 고수들이 가진 비기(祕技)가 아닐까.

동양의 고전 논어(論語)에서는 이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차이로 설명한다. 소인은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거나 휩쓸리지만,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화이부동, 和而不同). 우리가 마주한 그들이 소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똑같이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짖는 개와 똑같이 짖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한계는 있다. 주식 투자에 손절매 원칙이 있듯, 인간관계에도 '손절 라인'은 필요할 것이다. 일정 기간 전략적으로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기미가 없거나, 본인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해친다면 과감히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차단해야 한다. 접촉의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조차 감정적인 폭발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에 기반한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우리는 일상의 많은 것을 기획한다. 업무를 기획하고, 소비를 기획하고, 휴가를 기획한다. 이제는 인간관계 또한 기획의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 닥쳐오는 대로 반응하고 상처받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상대를 분석하고 나의 대응을 설계하며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인내심, 통찰력, 장악력)을 계산하는 주체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타인은 분명 고통의 근원이지만, 인간 심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된 자에게 타인은 성장의 도구이자 자아실현의 재료가 된다. 지금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당신의 내공을 쌓기 위해 신이 보낸 까다로운 '트레이닝 파트너'라고 재정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관점이 바뀌면 지옥은 훈련장으로 변하고, 고통은 성장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관계의 지정학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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