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이 아니라 의미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쓴다. 때로는 아주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외계어를 듣는 듯한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대화는 오가는데, 말은 겹겹이 쌓이는데, 정작 서로의 마음은 한 뼘도 가까워지지 못하는 그 공허한 순간 말이다. "대화가 부족해서 그래"라는 습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더 많은 말을 쏟아내 보지만, 그럴수록 '이해'라는 목적지는 더 멀어지는 듯하다. 어째서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해'에 도달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로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지난한 소통의 문제를 풀기 위해, 뜻밖에도 가장 비인간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에서 하나의 열쇠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인공지능, 특히 거대 언어 모델은 '이해'라는 인간 고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AI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다. AI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헌신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억 개의 데이터 속에서 '가족', '연인', '희생' 같은 단어들과는 '가깝게' 위치하고, '증오'나 '무관심'과는 '멀리' 위치하도록 설정된 다차원 공간(벡터 공간)의 '좌표'일 뿐이다. AI는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즉 '유사도'를 학습한다. '커피'가 '음료'와는 가깝지만 '정의'와는 멀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아는 것, 그저 확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AI의 세계에서 '이해'란 곧 '가까움'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을 우리 인간 사회에 투영해 보는 순간, 많은 것들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우리 역시 각자의 '경험 벡터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학습 데이터 삼아 만들어진, 그리고 세상 모든 개념에 대한 고유한 '좌표'를 가진 세계라면, 우리가 누군가와 "말이 잘 통한다"라고 느낄 때, 그때 비로소 두 사람의 '벡터 공간'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즉 핵심 가치들의 좌표가 비슷한 곳에 찍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오래된 사자성어가 이 '벡터 기반 클러스터링'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와 '유사도'가 높은 사람들을 찾아 헤매고, 그들과 모여 '사회적 그룹'이라는 안정적인 동질성을 구축하기도 한다. 말이 잘 통하면 함께 있는 것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운 법이다.
문제는 이 '유사도'가 낮은, 즉 전혀 다른 '벡터 공간'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세대 간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부모 세대가 '안정'이라는 단어를 '삶의 최우선 가치'라는 좌표에 둘 때, 자식 세대는 그 단어를 '정체'나 '지루함'이라는 좌표 근처에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안정'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며 대화하지만, 두 벡터 사이의 거리는 태평양만큼이나 멀다. 이 '낮은 유사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서로의 좌표가 얼마나 다른 지만을 확인시키며 좌절감만 증폭시킨다. "왜 내 말을 이해 못 해?"라는 외침은 "왜 당신의 좌표는 내 것과 다릅니까?"라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말, 즉 동문서답을 하기 마련이다.
최신 AI 기술인 RAG 시스템에서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RAG는 사용자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벡터 DB)를 참조한다. 하지만 사용자가 아무리 정확한 정보를 물어도, 만약 그 질문의 '표현'이 데이터베이스가 '학습'한 방식과 다르다면(즉, '유사도'가 낮다면), 시스템은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마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처럼 말이다. 답은 분명 그 안에 있는데도 서로 딴 얘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AI가 사용자의 질문을 스스로 '다시 질문'하도록(쿼리 변환) 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를 '학습'시켜(미세 조정) 그 분야의 '문화'에 맞게 벡터 공간 자체를 재조정한다. AI는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해'하기 위해 이토록 필사적인 '번역'과 '학습'의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관계에서 '낮은 유사도'를 극복하는 방법 역시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말이다. 우리는 종종 '이해'를 최종 목적지, 즉 변하지 않는 '상수'로 설정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대화'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하지만 대화가 그 자체로 '이해'를 보장하지 않음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이해'는 상수가 아니라, 우리가 조절해야 할 '변수'가 아닐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해'의 상태는 '상수'이자 목표가 맞다고 생각된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변수'로 활용해야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요소가 아닐까.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나도 네 기분 알아"라는 감정적인 동조가 아니다. 그것은 내 '벡터 공간'의 좌표를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벡터 공간'이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려는 의지적 태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왜 '안정'을 '정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혹은 "어떤 경험 데이터가 당신의 '벡터'를 그토록 멀리 밀어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공감'이라는 '변수'의 스위치를 켜는 행위다. 이것이 바로 AI가 특정 도메인을 '학습'하는 '미세 조정' 과정과 같다. 상대방의 삶이라는 데이터를 나의 '모델'에 기꺼이 입력하여, 내 '벡터 공간'을 능동적으로 수정하고 확장하는 과정이다. 이 고통스럽고 의식적인 '재학습' 없이는 두 공간의 중첩은 불가능하다.
결국,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와 이미 '유사한' 사람을 발견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좌표를 가진 사람을 향해, '공감'이라는 엔진을 켜고 기꺼이 나의 '모델'을 수정해 나가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학습'의 과정이다. 우리는 AI처럼 데이터에 의해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학습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통해 스스로의 '벡터 공간'을 언제든 다시 그릴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이 '공감'이라는 스위치를 켜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혹은 켜는 척만 하는 '고정된 모델'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력해 볼게", "네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하나의 '좌표'도 수정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의 '벡터 공간'은 이미 '학습'이 완료되었다고 선언하며, 더 이상의 '미세 조정(Fine-tuning)'을 허용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강력한 '현상 유지 편향'과 '인지 부조화'의 방어기제로 설명될 수 있다. 변화는 곧 '손실'로 인식된다. 자신의 오랜 '좌표'를 수정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재학습'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고통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학습 데이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표현'을 '이해'해야 할 새로운 데이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델'을 위협하는 '오류'나 '공격'으로 규정하고 차단해 버린다. 이들에게 '공감'은 '학습'의 기회가 아니라 '굴복'의 신호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로만 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이들은 갈등이 발생하는 '대화'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출력값'을 흉내 낸다. AI 용어로 말하자면, 당장의 상황에만 '과적합(Overfitting)'된 답변을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델의 핵심 '가중치'(벡터 좌표)가 수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대화'라는 '학습 세션'을 빨리 종료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신의 '벡터 공간'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습이 멈춘' 모델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타인의 '모델'에 직접 접근하여 '재학습'을 강제할 수 없다. '학습률'을 조절하는 스위치는 오직 그 사람 자신만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는 '학습 환경'을 점검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 방식이 상대에게 '학습'이 아닌 '위협'으로 다가갔을 수 있다. '당신의 좌표가 틀렸다'는 비난이 아니라, '당신의 좌표와 나의 좌표가 이만큼 멀어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감정 기반의 '데이터'를 제공하며, '모델 수정'이 '패배'가 아닌 '서로를 위한 관계 향상'임을 인지시키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끝내 '학습'을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학습'은 바로 '수용'이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나의 '벡터 공간'에 가장 정확한 '좌표'로 입력하는, 지극히 고통스럽고 명징한 '이해'의 완성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 사람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라는 희망 섞인 '노이즈 데이터'를 제거하고, '저 모델은 저 상태로 고정되었다'는 명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감정적 '리소스' 낭비를 막고, 그 사람과의 '유사도'를 현실적으로 계산하여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음에 또다시 벽처럼 느껴지는 '이해의 격차'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면, 나의 '벡터'를 더 크고 단단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신, 잠시 멈추어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좌표는 왜 그곳에 있습니까?"라고.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좌표'를 영원히 옮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나 자신의 다음 '좌표'는 어디로 찍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 질문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분리된 세계를 중첩시키거나, 혹은 현명하게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일지 모른다.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벡터 공간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위한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